2일 오전 북한은 김정은이 열차를 타고 중국으로 향했다는 것을 외부 세계를 향해 보여줬다. 이날 새벽에 공개된 노동신문에는 총 3장의 관련 사진이 실렸는데 전용열차 외부 모습, 전용열차 탑승 전 환담하는 김정은, 전용열차 내부에서 회의하는 김정은 모습이 포함됐다. 전용열차 안에는 미국 대통령실과 유사한 엠블럼이 벽에 붙어 있었고 같은 문양의 서류철도 보였다. 정상국가를 강조하려는 북한의 노력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2일 노동신문에 실린 김정은의 전용열차 내부 모습. 중국으로 향하는 김정은이 인민복을 입고 있다. 벽과 노트북에 미국 대통령실과 유사한 김정은 전용 엠블럼이 보인다. 노동신문뉴스1
평양을 떠나는 열차에 탄 김정은은 북한 내부에서 현지지도를 할 때 입는 것과 마찬가지인 ‘인민복’을 입었다.
● 김일성은 양복, 김정일과 김정은은 인민복
인민복은 할아버지 김일성 시대 혁명하던 사람들이 입던 옷이다. 북한에서 인민복을 유행시킨 사람은 김일성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1945년 해방 직후 소련군의 지지를 받으며 북한 대중들에게 얼굴을 드러낸 33세의 지도자 김일성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1950년 1월 농림수산부문지도일군 연석회의에서 연설하는 사진 속에서 김일성은 양복을 입고 있고, 1961년 9월 개최된 제 4차 당대회 때도 양복이었다. 1967년 6월 양복에 모자 쓴 채 옆구리에 팔을 올리고 인민 속에서 웃는 김일성 모습도 확인된다. 하지만 북한 최고지도자의 공식 복장은 인민복이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초까지 현지지도를 하거나 공식 행사를 할 때 그리고 중국을 방문할 때 김일성은 주로 인민복을 입었다. 김정일이 아버지의 후계자로 북한 정치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중앙일보에 따르면 김일성은 1984년 7월까지 인민복만 입었다. 1984년 7월 17일 잠비아 공화국 외교부 대표단 접견하면서부터 사망시까지 양복을 입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자신이 ‘닫긴 옷’(인민복)을 입고 모든 일을 할테니 아버지는 제낀 옷 (양복)을 입고 쉬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김정일에게 인민복은 일하는 사람의 복장인 것이다. 어쩌면 김정일은 아버지 김일성 시대와 달리 경제적으로 낙후된 북한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서 양복을 입을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다. 김정일은 사망할 때까지 거의 양복을 입지 않았고 인민복만 입었다. 북한 공식 매체에서 양복을 입은 김정일의 모습 사진은 거의 없었고, 1980년대 촬영된 ‘양복을 입고 상품박람회를 둘러보는 모습’이 김정일의 유일한 양복 사진이었다. 다만 김정일은 2008년 건강이상설 이후 사망 때까지 몇 번 양복을 입고 등장했다.
2009년 8월 김정숙 해군대학 시찰 기념사진 등 현지지도를 하는 모습에서 기존의 인민복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양복을 입고 등장했다. 자신이 권력을 잡은 후 아버지 김일성에게 양복을 권했듯이 아들이 권력을 이행받기 시작하자 김정일 본인도 비로소 양복을 입으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분석이 가능하다. 김정은의 경우는 좀 다르다. 2010년 9월 북한 정치에 공식 등장한 이후 김정은은 처음에는 인민복 차림으로 공개 활동을 했다. 김정은이 양복 차림으로 찍은 사진이 처음 공개된 것은 2012년 4월 12일이다. 당시 노동신문은 전날 열린 노동당 제4차 대표자회의에서 김정은이 노동당 제1비서에 추대된 소식을 전하며 양복에 넥타이 차림으로 포즈를 취한 김정은의 대형 사진을 게재했다. 이후 김정은이 행사를 하면서 양복 입은 모습이 등장했다. 2016년 5월 7일 조선로동당 제 7차 대회 개회사를 하면서 양복과 타이 차림으로 등장했고 당대회 직후 첫 공개 일정인 2016년 5월 13일 기계설비 공장을 현지지도하면서 현지지도 복장으로는 처음으로 양복을 입었다. 이후 양복 입은 김정은은 더 이상 특별한 이미지가 아니다.
김정은 집무실에 모인 ‘2기 지도부’
김정일 집무실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 김일성은 양복으로 김정일은 인민복으로 기록되어 있다. 노동신문뉴스1
● 외교 무대에서 김정은의 복장
외교무대에서 김정은은 대체로 인민복을 고수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면서 그는 인민복을 입었다. 2019년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악수할 때도 인민복을 입었다. 다만, 2023년 러시아를 방문할 때 김정은은 열차를 탈 때는 인민복을 입었지만 열차에서 내리면서 양복에 넥타이로 갈아입은 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3년 9월13일 러시아 동부 블라고베셴스크에서 약 200㎞ 떨어진 치올코프스키시 외곽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만나 악수하고 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은 16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지난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선물한 러시아산 아우루스 세나트 고급 리무진을 처음 이용했다며, 북한과 러시아 간 관계 심화를 찬양했다. 2024.03.16 [보스토니치 우주기지(러시아)=AP/뉴시스]
● 혁명하던 시절 사람들이 입던 옷
김정은이 입는 인민복을 북한에서는 ‘맞섶 양복’ 또는 ‘닫긴 깃 양복’이라고 하며 주민들은 일본어을 어원으로 둔 ‘쯔메르 양복’이라는 표현을 쓴다. 인민복은 북한의 발명품은 아니다. 인도의 간디와 우리나라 김구 선생 등의 사진에서도 비슷한 형식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중국에서는 ‘중산복(中山服)’이라고 부른다. 신해혁명으로 봉건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혁명정부 대원수로 취임한 쑨원(孫文)의 호가 ‘중산’이다. 쑨원을 계승한 장제스과 마오쩌둥도 중산복을 즐겨 입었고 그래서 서방에서는 ‘마오룩(Mao Look)‘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 중산복이 사라지기 시작한 건 개혁개방 이후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83년 후야오방 총서기가 선전 특구를 방문해 “특구 간부는 옷을 잘 입어야 한다. 과감하게 양복을 입어라” 라고 지시를 내리면서 양복이 중산복을 대체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2014년 2월 네덜란드를 방문해 국왕 부부 초청 만찬에 참석하면서 시진핑은 개량 중산복을 입었지만 대체로 외교무대에서는 양복을 입는다.
● 인민복 입는 김정은, 시진핑과 깔맞춤 하게 될까
내일 3일 중국 베이징에서는 ‘전승 80주년’ 기념행사와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김정은은 천안문 망루에 올라가 군중들을 향해 손을 흔든다. 시진핑과 푸틴과 나란히 선 채.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지도자들은 북한을 비롯한 외국 정상들을 만날 때 양복을 입는다. 시진핑도 마찬가지다. 다만 예외적으로 중산복을 입고 행사에 참석하는 경우는 있다. 10년 전인 2015년 9월 3일 ‘전승 70주년’ 기념행사가 열렸을 때 시진핑은 인민복을 입고 망루에 섰다. 옆에 있던 전직 장쩌민과 후진타오 주석이 양복을 입었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푸틴은 양복을, 박근혜 대통령은 노란색 정장을 입었다.
2015년 중국 전승절 행사에서 시진핑은 양복을 벗고 중산복을 입었다. 오른쪽 푸틴은 양복을 입고 있고 전직 주석들도 양복을 입고 있다. 베이징=변영욱 기자 cut@donga.com시진핑이 10년 전 행사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인민복을 입고 망루에 오른다면 왼편에 서는 김정은과 유사한 옷을 입고 서게 될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 서는 푸틴의 양복과는 대조를 이룰 것을 예상할 수 있다. 혁명하던 시절에 유행하던 인민복을 입고 국제 무대에 등장하고 있는 김정은을 보면서 오랜만에 중산복을 입어 보는 시진핑은 무슨 생각을 할까.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