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소녀’ 이면의 치열했던 삶…임춘애 “천천히 달릴 수 있음에 행복” [이헌재의 인생홈런]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3월 9일 12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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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애가 1986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1500m 결선에서 아시아기록 보유자인 중공의 양류사 선수를 따돌리고 1위로 골인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임춘애가 1986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1500m 결선에서 아시아기록 보유자인 중공의 양류사 선수를 따돌리고 1위로 골인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영화 ‘넘버3’에 나오는 명장면 하나. 송강호가 부하 조폭들에게 ‘헝그리 정신’에 대해 가르치다 이렇게 얘기한다. “거 누구야, 현정화! 걔도 라면만 먹고 육상해서 금메달 3개씩이나 따버렸어.” 눈치 없는 부하는 ‘진실’을 말한다. “임춘애입니다. 형님.”
일순간 흐르는 정적. 무식이 탄로 난 송강호은 말한다. “나가 있어.” 그리고 ‘퍽, 퍽’ 소리와 함께 무자비한 폭행이 시작된다.

임춘애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금메달 3개를 딴 지 벌써 40년 가까이 지났다. 무명 선수에서 육상 3관왕(800m, 1500m, 3000m)에 오른 임춘애는 일약 ‘신데렐라’가 됐다.

하지만 송강호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여전히 ‘라면 소녀’다. 당시 그를 가르친 코치가 열악한 운동부 환경을 얘기하며 “간식으로 라면을 먹는다”고 얘기한 게 그가 라면만 먹고 금메달을 3개나 딴 것으로 곡해됐다. 이후 그는 인터뷰 때마다 사실이 아니라고 얘기했고, 코치 역시 과장됐다고 설명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임춘애는 “50대 중반인데도 사람들에게 나는 여전히 ‘라면 소녀’”라며 웃었다. 임춘애는 “저는 밀가루가 입에 맞지 않아 라면을 먹지 않았다. 동료 선수들도 가끔 간식으로 라면을 먹었을 뿐”이라며 “라면 국물에 밥을 말아서 먹은 적은 있다”고 했다.

1986년 아시안게임의 신데렐라 임춘애가 1988년 서울 올림픽 성화 봉송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1986년 아시안게임의 신데렐라 임춘애가 1988년 서울 올림픽 성화 봉송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우유를 마시며 운동하던 친구들이 부러웠다”는 발언 역시 오해다. 사실 그는 한 번도 우유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그런데 이야깃거리에 목말랐던 사람들이 우유 이야기도 진짜인 양 포장하면서 그는 ‘라면만 먹었고, 우유는 마시지 못하면서 운동했지만 성공했던’ 스토리의 주인공이 됐다.

임춘애는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우유만 마시면 바로 화장실에 가야 하는 체질이라 우유도 마시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여부를 떠나 한 우유업체는 선수단 앞으로 5년간 무료로 우유를 보내기도 했다. 정작 선수들이 가장 많이 먹었던 건 삼계탕 같은 보양식이었다.

레이스를 끝낸 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임춘애. 동아일보 DB
레이스를 끝낸 후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임춘애. 동아일보 DB

다만 당시 선수들의 운동 환경이 지극히 열악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한국에서 처음 열린 서울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선수들은 스파르타식 훈련을 견뎌야 했다.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명목하에 욕설과 체벌이 용인되던 시대였다.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중학교 3학년 때 반에서 키가 가장 작았을 정도로 왜소했던 임춘애는 경기 성남 지역에서 좀 뛴다 하는 정도의 선수였다. 좋아서 운동을 했다기 보다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맛에 육상을 계속했다. 중간에 고무줄놀이도 하면서 즐기듯 운동을 했다.

경기도청 직장운동경기부 지원협력관으로 일하고 있는 임춘애의 모습. 이헌재 기자

그런데 1986년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모든 게 달라졌다. 한국에서 열리는 첫 대형 국제대회를 앞두고 “몸이 망가져도 좋으니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지침이 내려왔다. 선수들은 말 그대로 뼈를 갈아야 했다.

그는 사실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 열린 전국체전에서 3관왕을 하면서 뒤늦게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후 17세 소녀는 새벽, 오전, 오후, 야간까지 쉴 새 없이 달려야 했다. 기록이 좋아지는 만큼 몸은 망가졌다. 임춘애는 “얼마나 훈련을 많이 했던지 훈련을 끝내면 유니폼이 소금에 절인 것처럼 됐다”며 “훈련이 너무 힘들다 보니 대회에 나가는 게 너무 좋았다. 대회 때는 예선과 결선 등 딱 두 번 만 뛰면 됐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모진 훈련을 견딘 끝에 그는 아시안게임 3관왕에 올랐다. 하지만 그때 이미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2년 뒤인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때 성화 봉송 마지막 주자로 나선 게 인생의 하이라이트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출전한 서울올림픽에서도 그는 아시안게임 때와 비슷한 기록을 냈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아시아 무대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았다. 예선 탈락을 하자 이번엔 “배에 기름이 껴서 제대로 못 뛴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경기도청 직장운동경기부 지원협력관을 맡고 있는 임춘애(왼쪽)가 지난달 동계체전 때 유승민 대한체육회장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임춘애 제공
경기도청 직장운동경기부 지원협력관을 맡고 있는 임춘애(왼쪽)가 지난달 동계체전 때 유승민 대한체육회장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임춘애 제공

이화여대에 재학 중이던 그는 은퇴를 하려 했다. 운동은 너무 힘들었고, 운동을 계속할 수 있는 몸 상태도 아니었다. 하지만 육상계는 그에게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까지 뛸 것을 제안했다. 그는 골반뼈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 운동을 계속하는 게 무리라는 진단서를 제출하고서야 겨우 은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는 “정신상태가 틀려 먹었다”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임춘애는 “제대로 된 재활도, 심리상담 같은 것도 없었을 때”라며 “진단서를 제출해 은퇴하게 된 것은 내가 포기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은퇴 후 그는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렇다고 운동장 밖의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도 아니었다. 세 아이의 엄마가 된 그는 남편과 함께 생계를 꾸려야 했다. 보험회사 직원으로도 일했고, 수입차 영업사원으로도 뛰었다. 차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가 유명세 덕에 차를 몇 대 팔자 “고객을 빼앗아간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동료들 사이에서 나왔다.

이후 칼국수 가게를 차리기도 했고, 도시락 사업도 해 봤다. 하지만 사회생활 역시 쉬운 게 아니었다. 그는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사거나 방해를 받곤 했다. 많은 걸 배운 시간이었다”고 했다.

2016 서울국제마라톤 및 동아마라톤대회 해설자로 나선 육상 레전드 임춘애(왼쪽)와 황영조. 동아일보 DB
2016 서울국제마라톤 및 동아마라톤대회 해설자로 나선 육상 레전드 임춘애(왼쪽)와 황영조. 동아일보 DB

그 와중에 그는 고향과도 같은 육상과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지인의 추천으로 한 주류 도매업 사장들이 만든 마라톤 팀을 지도했다. 임춘애는 “예전 선수 생활을 할 때는 누군가를 이기기 위한 달리기를 했다”며 “동호인 팀을 가르치면서 ‘아, 재미있게 뛰는 달리기라는 것도 있구나’라는 걸 새삼 느꼈다”고 했다. 이후 초등학교와 고등학교 육상 지도자로 다시 활동하기 시작했다.

과도한 운동 후유증으로 그는 지금도 몸이 좋은 편이 아니다. 조기 치료로 완치되긴 했지만 몇해 전 유방암 수술 후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고생도 많이 했다. 그는 “방사선 치료 막판에 세 번 정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며 “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정신을 차렸다. 잘 자라준 세 아이에게 부끄러우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일어섰다”고 했다.

작년에는 오른쪽 무릎 수술도 받았고, 앞서는 양쪽 눈 백내장 수술도 했다. 하지만 그는 “유튜브나 책을 통해 좋은 말씀들을 많이 들으면서 마음공부를 많이 했다. 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 작은 일에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배웠다”고 했다.

임춘애와 세 자녀(이지수, 현우, 지우)의 모습. 임춘애 제공

마음을 편하게 먹자 거짓말처럼 그에게 다시 길이 열렸다. 몇 해 전 안산청소년재단 정책기획실장으로 임명돼 달리기 교실 등을 열었고, 작년부터는 경기도 경기도청 직장운동경기부 지원협력관을 맡고 있다. 도청 산하 10개 실업팀의 지원 및 현안 조정, 선수들과의 소통 등이 주 업무다. 그는 지난달 강원 평창에서 열린 겨울체전 현장도 찾아 선수들을 응원하고 격려했다.

최근 들어서는 다시 운동도 시작했다. 무릎에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 천천히 뛰거나 빨리 걷는다.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도 한다. 무릎 수술 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생애 최고 몸무게는 경신한 그는 요즘은 “천천히라도 달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었는지를 깨닫고 있다”고 했다. “한 때 추리닝은 꼴도 보기 싫었다”는 그는 “최근 들어 운동은 정말 해야 하는 거였구나 라는 걸 새삼 느낀다. 운동을 하니 몸이 좋아지고 시간이 훌쩍 간다”고 말했다.

임춘애가 산책을 하고 있다. 운동이 싫었다는 그는 최근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임춘애 제공
임춘애가 산책을 하고 있다. 운동이 싫었다는 그는 최근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임춘애 제공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그는 이기기 위해, 또는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다. 최근 들어서는 그동안 해보지 못했던 요리를 배우고, 입지 않는 옷을 고쳐 입는 등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그는 “결혼 후 경력이 단절돼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만은 않았다”며 “선배 체육인으로서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잘 살아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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