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타이어 회사 미슐랭(Michelin·미쉐린)이 펴내는 관광 안내서는 두 가지 색깔이 있다. 미슐랭 레드북(Red Guide)은 우리가 잘 아는 맛집과 호텔을 추천하는 책이다. 미슐랭 그린북(Green Guide)은 관광 명소나 드라이브 코스를 소개하는 여행 안내서다. 미슐랭 그린 가이드가 유일하게 한국 아름다운 도로에 별(★)을 붙여 준 곳이 있다. 바로 경북 안동 도산서원에서 봉화를 거쳐 강원 태백 초입까지 이어지는 국도 35호선, 약 75km 구간이다.
● 봉화 미슐랭 스타 길 경북 봉화 35번 국도는 청량산을 끼고 굽이굽이 흐르는 낙동강을 따라 이어진다. ‘산(山)태극 수(水)태극’. 산과 물이 서로 어우러지며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봉화군 명호면 범바위전망대에 서면 낙동강이 굽이쳐 물도리를 이루는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35번 국도는 드라이브도 좋지만 걷기에도 좋다. 퇴계 이황이 청량산으로 가던 낙동강변 4~5km 구간 ‘예던길’은 대표적인 산책로. 선유교와 학소대, 농암종택, 고산정 풍경은 퇴계가 ‘나 먼저 그림 속(畵圖中)으로 들어가네’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첩첩산중 봉화는 산이 깊고 골도 많다. 선비들은 경치가 좋은 곳에 누각(樓閣)과 정자(亭子)를 지었다. 선비의 고장 봉화에는 누정(樓亭)이 103곳이나 남아 있다. 봉화 ‘정자문화생활관’에 가보면 보물 ‘청암정’을 비롯해 수많은 누각과 정자가 소개돼 있다.
그중에서 ‘춘향전’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 된 인물이 지었다는 ‘계서당(溪西堂)’이 흥미로워 찾아가 봤다. 봉화군 물야면에 있는 계서당 종택 안마당에는 판소리 춘향전 암행어사 출두 장면에서 이몽룡이 읊었던 한시가 걸려 있다. ‘금준미주천인혈(金樽美酒千人血·황금 술잔의 맛있는 술은 천 사람의 피요)’로 시작되는 이 유명한 시가 왜 경북 종갓집에 걸려 있는 것일까? 1613년 이 시를 쓴 주인공은 조선 중기 문신이던 계서 성이성(溪西 成以性·1595~1664)이었다. 설성경 연세대 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춘향전의 비밀’이란 책에서 춘향과의 러브스토리주인공인 이몽룡의 실제 모델이 성이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실제로 성이성의 아버지 성안의는 1606년(선조 40년)에서 1611년까지 남원부사(府使)를 지냈다. 성이성은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와서 12세부터 16세까지 살았다. 성이성은 인조 5년(1627년) 문과에 급제한 후 4번이나 호남과 호서 지역 암행어사로 등용되었고, 담양부사 진주부사를 비롯해 6개 고을 수령을 지냈다. 한시 금준미주천인혈은 성이성의 ‘호남암행록(湖南暗行錄)’과 일기 등을 정리해서 펴낸 ‘교와문고 3권’에 수록돼 있다.
계서당 안마당 마루 옆에 세워져 있는 ‘금준미주천인혈’ 한시.그는 52세 때인 1647년 남원 광한루에 들러 “소년 시절 일을 생각하고는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소감을 적었다. 여기서 ‘소년 시절 일’이란 춘향이와의 이루지 못한 로맨스라는 것이 설 교수의 해석이다. 암행어사 성이성이 호남을 두루 암행했지만 실제로 남원에 출두했다는 기록은 없다. 판소리에서와 달리 현실 속에서 이몽룡과 성춘향은 서로 빗나간 채 생전에 다시 만나지 못했다. 한양으로 아버지를 따라 떠난 성이성은 곧 고향 봉화로 내려갔고, 18세 되는 1613년에 이웃 닭실마을 부유한 집안 여인과 결혼했다. 그해에 혼수로 받은 유산으로 계서당을 지었다. 계서당 뒷편에 있는 소나무 한 그루는 50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서 있다. 서남쪽 남원 방향으로 굽은 이 소나무는 ‘이몽룡 소나무’로 불린다.
계서당 대청마루에는 지난해 전남 담양군민이 ‘전 담양부사 성이성’에게 준 ‘군민의 상’ 특별상이 걸려 있다. 성이성이 담양부사 재직 시절 영산강 범람과 수해를 막기 위해 제방인 ‘관방제림’을 만든 공을 400여 년 만에 기리기 위한 것이다. 담양군민이 봉화의 옛 선비에게 특별상을 준 것은 무척 흥미롭다. 봉화군은 10월 ‘제1회 전국 이몽룡 선발대회’를 연다고 한다. 남원 ‘춘향 선발대회’는 올해로 95회째를 맞는다. 영호남 화합 차원에서 남원 춘향이와 봉화 이몽룡이 만나는 TV 연예 프로그램도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 ● 붉은 여우는 죄가 없다
봉화에 정자문화생활관이 있다면 영주에는 소수서원과 선비촌, 선비세상 같은 유교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런데 영주 여행에서 뜻밖의 감동을 얻은 곳은 순흥면에 있는 ‘소백산 여우생태관찰원’이었다. 멸종위기 1급 야생동물인 토종 붉은 여우 복원 사업을 위한 시설이다. 붉은 여우는 줄임말로 불여우, 경상도 사투리로 불여시로 불린다. 아마도 가장 오해를 많이 받아 온 동물이 아닐까.
동서양 전설, 설화, 동화 속에서 여우는 교활하고 속임수와 권모술수, 변신의 상징으로 나온다. 때로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다. 특히 과거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 9개 꼬리를 가진 1000년 묵은 여우 구미호(九尾狐)가 여인으로 변신해 유혹한 남성의 간을 빼먹는 장면은 공포 그 자체였다.
여우는 주둥이가 개보다 길고 뾰족하다. 털이 풍성한 꼬리도 몸통만큼 길다. 털은 황갈색이지만, 햇빛 비치는 곳에 나가면 붉은색으로 보인다고 하여 붉은 여우다. 여우는 하드웨어는 개를 닮았지만, 습성은 고양이를 닮았다. 민가 주변 야산에 살면서 쥐를 잡아먹고 산다. 고양이처럼 경계심이 가득해 사람을 보면 겁내고 피한다. 사람을 공격하는 구미호는 전설일 뿐이다.
멸종위기 1급 토종 붉은 여우. 풍성한 꼬리털 때문에 ‘여우 목도리’로 인기가 높아 한때 마구잡이로 포획됐다.
여우는 자연에서 단독 생활, 단독 사냥을 하기 때문에 경쟁종인 삵이나 오소리, 담비, 멧돼지를 당해낼 수가 없다. 무리지어 덤벼드는 들개하고도 싸움이 안 된다. 한반도에서 여우가 멸종된 이유는 1960년대 대대적으로 진행한 ‘쥐잡기 운동’ 여파가 크다. 사람이 뿌려 놓은 쥐약 먹은 쥐를 여우가 먹고 2차 중독으로 대량 멸종됐다. 또한 부유층 패션 아이템이던 ‘여우 목도리’를 위해 마구잡이로 포획돼 털가죽이 벗겨졌다.
여우가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은 여우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한몫했다. 그러나 여우생태관찰원 해설사는 “여우는 우리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라고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 농민들의 골칫거리는 농작물에 큰 피해를 끼치는 고라니와 멧돼지다. 세계적으로 멸종위기 종인 고라니의 90%가 우리나라에 살고 있다. 최상위 포식자가 없기 때문이다. “여우가 좋아하는 먹이 중에 새끼 고라니와 새끼 멧돼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우가 야생 고라니와 멧돼지 숫자를 적절히 조절해 왔죠. 그런데 여우가 멸종되자 그 역할을 해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10년 이상 소백산에서 토종 붉은여우 복원 사업을 벌인 결과 지금까지 약 100마리가 야생 적응 훈련을 거쳐 자연으로 돌아갔다. 방사된 여우는 현재 소백산권(圈)을 넘어 강원 원주, 충남 부여, 부산 달맞이고개 등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농가에서는 지금도 고라니와 멧돼지를 잡기 위해 올가미와 덫을 놓고 있다. 그런데 그 덫에 복원 사업을 하고 있는 여우가 잡혀 죽고 있다. 복원팀 직원들은 위치 추적기로 여우의 움직임을 탐사한다. 비정상적인 발신음이 들려올 경우 끝까지 추적해 찾아가 보면 대부분 로드킬을 당하거나, 덫에 걸려 죽거나 다리가 잘려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소백산 여우생태관찰원에서 보호하고 있는 여우들은 야생으로 보냈다가 다치거나 병들어서 돌아온 것들이다. 이곳을 방문한 한 학생은 한쪽 다리가 잘린 채 걷는 여우를 보고 “너무 불쌍하다. 여우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자연환경을 잘 보존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맛집=경북 봉화군 물야면 백두대간수목원 가는 길에 있는 ‘봉화객주화덕피자’는 깊은 산골에서 이탈리아 정통 화덕 피자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옛날 보부상들이 목을 축이던 오전약수터에서 떠온 약숫물로 직접 반죽한 수제 도우(dough)에 임실치즈와 루꼴라, 새우, 방울토마토 등을 올려 참나무숯 화덕에서 구워 낸다.
영주 순흥면 소수서원 가는 길에 있는 ‘순흥전통묵집’은 도토리묵이 아니라 메밀묵으로 묵밥을 만든다. 채를 친 메밀묵에 다진 신김치와 무생채를 고명으로 올리고 김과 잘게 썬 파, 참기름, 깨소금 등이 올라간다. 메밀묵은 저칼로리 다이어트 식품이다. 묵으로 부족한 사람은 남은 육수에 공기밥을 말아먹으면 한끼 식사로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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