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 모리미술관 루이스 부르주아 회고전 ‘나는 지옥을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말하자면 그곳은 황홀했습니다.’(I have been to hell and back. And let me tell you, it was wonderful) 전시 전경. 사진 김민
태어나기 싫었던 아이와, 세상에 나온 뒤의 외로움
어머니를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아이. 그럼에도 마침내 세상에 태어나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느끼게 되는 끝없는 외로움, 허무와 결핍.
이번 전시에서는 위협적이지만 따스하고, 나약하지만 강한 거미 엄마 대신 깊은 고독과 허무를 곱씹으며 실을 잣는 여자로서 부르주아를 만났습니다.
이번 모리미술관 ‘나는 지옥을 여러 번 다녀왔습니다. 말하자면 그곳은 황홀했습니다.’(I have been to hell and back. And let me tell you, it was wonderful)는 일본에서 27년 만에 열리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회고전이자, 대형 설치 작품과 회화, 드로잉 판화 등 다양한 매체 100여 점을 선보이는 일본 최대 규모 전시입니다. (내년엔 호암미술관에서도 열립니다) 그만큼 많은 기대를 품고 전시장을 찾았습니다.
2년 전 뉴스레터에서 부르주아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요. 그녀의 어린 시절 트라우마와 정신분석학을 공부하며 벗어난 과정에 집중했었는데.
이때의 기억과 더불어 그녀가 예술을 공부하기 전 소르본에서 수학과 기하학을 전공했다는 것이 섞여 저는 부르주아를 냉정한 지성인으로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고독을 마주하는 감옥을 표현한 듯한 ‘2번 죄인’(Culprit Number Two, 1998년). 사진 김민 그런 점에서 흥미로웠던 또 다른 설치 작품은 ‘2번 죄인’(Culprit Number Two)이었습니다. 무거운 철문 6개로 둘러싸인 공간은 살짝 벌어진 틈으로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있습니다. 그 안에는 위 사진처럼 조그마한 나무 의자와 얼굴이 겨우 보일 정도 크기의 동그란 거울이 보입니다.
나무 의자는 관객을 등진 방향으로 놓여 있어, 관객은 그 의자에 앉아 홀로 자기 얼굴만을 바라보는 사람을 상상하게 됩니다. 뒤로 열린 틈으로 언제든 나갈 수 있지만 이 사람은 스스로 만든 감옥에 있습니다.
타의로 갇힌 감옥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곳은 오히려 나에게 주어진 문제를 마주하고 정면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담긴 공간임을 느낍니다.
삶에서 고통이 찾아올 때 처음엔 그걸 외면하고 덮어 두려 하지만, 완전히 해결하지 못해 결국 타인을 괴롭히거나 상처를 주기도 하죠.
‘장본인(Culprit)’이라는 제목은 “네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너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목소리로 들립니다. 부르주아가 이 작품에 대해 남긴 말에서도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삶에서) 고통은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고통을 치유하거나 회피할 방법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단순하게. 내가 가진 고통을 차분히 바라보고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반대편에서 본 ‘2번 죄인’(Culprit Number Two, 1998년). 사진 김민 그렇지만 이 감옥의 육중한 무게와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저는 2000년 테이트모던이 개관할 때 터빈 홀을 처음으로 채웠던 부르주아의 타워 작품을 떠올렸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나는 하고, 없애고, 다시 한다’(I do, I undo, I redo)‘.
그러니까 삶에서 시시각각 찾아오는 혼란을 마주하고, 해결하는 무언가를 만들었다가, 그것이 효용이 다하면 없애고 다시 새로운 것을 만드는. 끊임없는 과정 자체에 더 방점이 놓여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커미션을 맡았던 큐레이터 프랜시스 모리스의 회고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탑 작업에 붙여진 제목, ‘하고, 없애고, 다시 하고’(I do, I Undo, I Redo)는 우리가 인생에서 타인과 관계를 정의하고 재정의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작가가 직접 골랐다. 하고, 없애고, 다시 하기란 사실상 부르주아의 모든 작업의 주제라고 할 만하다.”
또 모리스는 이런 말도 남겼습니다.
“그녀의 삶은 매혹적이고 흥미롭지만, 결국 평범한 한 사람의 인생이다. 그녀가 묘사하는 인간관계가 불러일으키는 여러 감정을 우리 모두는 부모, 자녀, 아내, 남편, 또는 연인으로 살면서 느낀다.
사랑과 따스함은 물론 극단적 증오와 폭력, 그리고 질투까지.
우리는 보살핌과 보호를 받는다고 느끼다가도 하루아침에 고독과 불안을 느낄 수 있다. 사랑의 유혹을 받다가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니 부르주아의 예술이 그녀의 삶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그 내용과 의미는 분명히 보편적인 것이다.”
자신의 삶을 깊이 파고들어 보편적인 이야기에 닿는 것. 그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거울처럼 자기의 감정과 삶을 비춰보도록 하는 것. 좋은 예술 작품이 주는 감동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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