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마티스, 삶의 기쁨(Le bonheur de vivre), 1905~1906, 캔버스에 유채, 176.5X240.7cm. 그림의 한가운데 군무를 추는 사람들로부터 동그란 리듬이 각기 다른 색과 형태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미국 필라델피아 반스 재단 제공.
흔히 ‘자유’라는 단어를 말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모습은 이렇습니다.
넓게 펼쳐진 들판을 마음껏 뛰어다니거나, 아무런 장애물 없이 하늘을 나는 사람.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무한한 자유’를 상상하죠.
앙리 마티스(1869~1954)의 작품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것도 이러한 자유입니다.
역동적으로 원을 그리며 뛰는 사람들을 그린 ‘춤’이 대표적이죠.
이 ‘춤’을 그리기 전 마티스가 낙원을 상상하며 그린 작품이 있는데요. 바로 ‘삶의 기쁨’입니다.
오늘 이 작품을 통해 마티스가 자유로운 표현을 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프랑켄슈타인 같은 ‘낙원’
‘삶의 기쁨’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낙원을 주제로 한 그림입니다.
그림 속에는 울긋불긋한 들판 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사람들이 한가롭게 누워 있거나, 악기를 연주하며 춤을 추고, 애정 표현을 하고 있죠.
시각부터 청각, 촉각을 자극하는 이 그림을 마티스의 작업실에서 처음 본 동료 화가 폴 시냐크는 기겁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좋아했던 마티스가 완전히 퇴보했다. 2.5m 폭 캔버스에 이상한 인물들을 엄지손가락만 한 두꺼운 선으로 칠하고, 화면 전체를 엷은 색조로 칠했다. 심혈을 기울여 칠한 색이지만 내 눈엔 역겨웠다.”
1906년 프랑스 파리 앵데팡당 전시장에 걸렸을 때 반응은 더합니다. 이곳을 찾았던 딜러 베르트 베이의 회고입니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화난 관객의 고성, 놀란 사람들의 웅성임, 비명 같은 비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 모든 소리는 마티스의 그림을 조롱하며 어슬렁거리는 군중이 내는 것이었다.”
왜 이런 반응이 나왔을까? 이 그림의 인체 표현이나 원근법 사용이 아카데미 그림에 익숙한 관객에겐 ‘엉터리’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보면 오른쪽 아래 분홍빛 남녀와 중앙의 두 여성, 그 뒤로 군무를 추는 사람들의 크기가 비율이 맞지 않습니다.
또 그림 속 인물들은 마치 뼈가 없는 고무 인간처럼 신체 비율이 제각각이죠. 각 인물을 본 시점이 전부 다르고, 인체를 그리는 기준도 다른, 마치 프랑켄슈타인처럼 짜깁기 된 그림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