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바로 이 ‘비명 지르는 교황’ 연작인데요. 위 작품은 스페인 거장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린 ‘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 초상화를 차용한 것입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 인노켄티우스 10세 초상. 벨라스케스가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캐릭터를 현실적 표현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아주 미묘하게 캐치했지만, 베이컨은 이를 극적으로 변형해 투명한 상자에 갇혀 비명을 지르는 모습으로 그립니다.
교황의 초상을 이렇게 그리다니. ‘신성 모독’으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연작을 발표했을 때 영국 평단의 반응도 극명히 엇갈렸습니다.
일부 평론가들은 베이컨의 그림이 지나치게 충격적이고 불쾌하다고 비판했고, 다른 사람들은 “공포스럽지만 기술적으로 뛰어나다”며 “무시할 수 없는 작품”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이 연작은 “전후 시대의 불안과 절망을 가장 강렬하게 시각화한 작품”이라거나 “인간 조건의 어두운 본질을 새로운 시각 언어로 그렸다”는 호평을 받게 됩니다.
이런 ‘선을 넘는’ 듯한 표현이 공감을 얻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 그림이 그려진 시대, 1950년대의 ‘맥락’이 있습니다.
두 번의 전쟁, 신이 죽은 세상
제2차 세계대전 1950년대 유럽은 두 차례의 전쟁,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그동안 믿어왔던 모든 가치관이 혼돈에 빠진 상태였습니다.
최고의 지성과 문화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던 유럽 사회가 야만적인 폭력과 파시즘으로 얼룩졌고 수많은 죽음을 목격해야만 했죠.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부터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이 지성 사회에 큰 공명을 일으키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베이컨의 그림 속에서 교황은 더 이상 신을 대리하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비명을 지르며 온갖 감정을 느끼는 한낱 ‘고기 덩어리’로 표현되고 만 것입니다.
영화 ‘전함 포템킨’의 유명한 장면을 차용한 베이컨의 작품. ‘Study for a Head’. 이런 맥락을 생각하지 않은 상황에서 베이컨의 작품을 보면 거부감이 들기도 합니다. 비틀어진 살 덩어리 같은 사람들의 몸이 보는 사람도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커는 왜 이 작품을 좋아한 걸까?
영화 ‘다크나이트’(2008)에서 배트맨과 조커. ‘배트맨’에서 주인공들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나뉘어지는데, 여기서 결벽증적일 정도로 ‘선’에 집착하는 것이 배트맨이라면, ‘조커’는 그로 인해 생겨나는 그림자 같은, 묘하게 배트맨을 닮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존재이고, 때로는 세상을 향한 애정과 공감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가지만, 또 다른 때에는 동물적인 욕망에 휩싸이기도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한 면을 제거하고 완전무결한 ‘신’처럼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광기가 아닌가?’ 조커는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죠.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이런 배트맨과 조커의 구도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저서 ‘광기의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책은 ‘광기’라는 것이 타고나는 정신질환이 아니라 사회가 규정하고 배제하는 방식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사회적 구성물’임을 역사적 사례를 통해 보여줍니다.
즉 어떤 시대에는 미친 사람으로 격리되는 사람이 다른 시대에는 뛰어난 감각을 지닌 선지자로 인정받기도 했는데, 근대 이후 유럽 사회가 정신병원처럼 특정 집단을 감시, 격리, 감금하는 제도를 만들었고 그 산물이 ‘광기’라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조커는 영화 속에서 내내 이렇게 묻죠.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세상이 미친 것인가?’
이렇게 무엇이 선이었는지 억지로 정해 놓다가, 그 추악한 면을 드러낸 사회(1,2차대전 이후 유럽)의 민낯을 보여준 것이 베이컨의 예술이었으니, 이런 구도를 대중 문화적으로 풀어낸 영화 속 인물인 ‘조커’는 베이컨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으로 설정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금기’를 건드리는 예술의 조건
이렇게 금기를 건드리는 예술은 20세기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 의해 폭발적으로 그 경계를 열어젖혔고, 그 결과 아주 다양한 표현 방식을 지닌 예술 작품이 - 캔버스뿐 아니라 퍼포먼스 등 다양한 형식으로 -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동물의 사체를 가져와 전시하거나, 피를 뽑아 굳혀서 두상을 만드는 등 ‘불쾌함’을 건드려서 눈길을 끄는 일종의 ‘전략’으로 사용하는 작가들도 종종 볼 수 있는데요. 저는 이런 작품들을 볼 때 ‘이게 어떤 맥락에서 이뤄진 걸까?’를 고민하게 됩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 ‘노베첸토’(1997). 서양에서 말이 상징했던 권위, 영웅, 제국주의 이미지를 축 늘어진 사체로 전시해 20세기와 전통의 몰락을 표현했다. 예를 들어 동물의 사체를 미술관에 가져와 전시할 때에는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예전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했지만, 이제는 시대가 바뀌고 사람들의 공감 능력이 높아지고 있는 만큼 ‘생명 존중’의 차원에서도 그 작품을 따져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생명 존중’의 가치를 뛰어 넘는 시급함, 시대적인 요구, 혹은 작가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 결여되어 있다면 과연 동물의 사체를 전시해도 되는 것인가? 혹시 이건 ‘눈길을 끌기 위한 선을 넘은 장난에 불과한 건 아닐까?’ 의심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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