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시간의 행복, 틈새투어] 황금 같은 틈새 여유 시간. 막상 갈 곳을 몰라 허비하기 쉽지요. 편안한 휴식도 좋지만 때론 낯선 공간이 주는 활력이 필요합니다. 숨은 보석 같은 공간에서 짧지만 확실한 충만을 만끽해 보세요.
그래픽 백재훈 대표의 NO1 추천 만화 ‘신들의 봉우리’(전 5권)의 표지.
지난해 11월 서울 송파구 대신위례센터에 가오픈한 ‘그래픽 바이 대신’. 2000여 권의 만화책, 그래픽 노블, 아트북을 갖췄다. 그래픽 바이 대신 제공 어린 시절 종이만화는 TV나 책처럼 누구나 즐기는 장르였다. 성인이 된 이후엔 아니다. 만화는 소수가 즐기는 취미로 분류되고 만화 읽는 어른에겐 키덜트 딱지가 붙는다. 3040 세대로선 문화적 환경 변화에 내몰린 측면이 크다. 이따금 나를 키운 만화가 그리워도 만화방은 맥이 끊긴 지 오래. 멀티방 느낌의 만화카페나 웹툰은 리모델링한 노포처럼 어색하게 느껴진다.
지난해 11월 서울 송파구 대신위례센터에 가오픈한 ‘그래픽 바이 대신’은 이런 어른들에게 딱 맞는 공간이다. ‘H2’ ‘드래곤볼’ ‘닥터슬럼프’부터 ‘미생’ ‘정년이’ ‘식객’까지…. 발 받침대에 다리를 올린 채 만화책에 코를 박고 커피를 홀짝이다 보면 도파민과 엔돌핀이 황금비율로 샘솟는다.
그래픽 바이 대신 대기 공간에 띠처럼 둘러둔 만화잡지 ‘영챔프’. 이설 기자 snow@donga.com
만화책 읽으며 ‘불멍’
“가오픈한 지 3달이지만 주말엔 대기팀이 100팀 남짓이에요. 기다리는 분들이 지루하실까봐 ‘영챔프’를 준비했습니다. 개인 소장가에게 50여 권을 구입했죠.”(그래픽 바이 대신 홍승주 매니저)
지하 1층부터 2층까지 수직으로 탁 트인 공간, 전면 유리로 비쳐드는 햇살, 영화관 같은 아늑한 좌석…. 인스타그램에서 미리 엿본 그래픽 바이 대신은 분위기 좋은 도서관처럼 보였다. 답답하고 습한 기존 만화방은 물론 그래픽 이태원점(본점)과도 다른 느낌이었다. 1층에 들어서니 카페 겸 대기 공간에 띠처럼 둘러둔 ‘챔프’ 50여 권이 추억열차에 불을 댕겼다.
그래픽 바이 대신은 이태원의 그래픽 노블 카페 ‘그래픽’과 대신증권이 손을 잡고 만들었다. 술과 만화를 함께 즐기는 어른들의 만화카페 그래픽은 이태원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공간. 대신증권 측 제안으로 코로나 이후 비어 있던 대신위례센터를 그래픽 2호점으로 꾸몄다고 한다. 지역에 기여할 공간 마케팅을 고민하던 대신증권과 2호점 자리를 물색하던 그래픽이 ‘윈윈’한 셈이다.
공간 안쪽에 자리한 리딩룸. 노트북을 사용하거나 공부하는 이들이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마음에 드는 자리로 가셔서 QR을 찍으시면 됩니다. 3시간에 2만 원(리딩룸은 1만8000원)으로 음료 라운지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어요. 참, 만석이 아닐 때는 시간제한을 두지 않아요. 평일 저녁에 와서 10시 마감까지 계시는 분들도 적지 않죠.”
안내를 받고 들어서니 자리 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 자리도 탐나고 저 자리도 누리고 싶다. 총 76개의 좌석은 메인홀과 리딩룸으로 나뉘는데 ‘독서족’은 메인홀, ‘작업족’은 리딩룸을 선호한다. 아늑한 리딩룸 좌석에 앉으려다 “불멍이 보이는 홀 좌석이 인기”라는 매니저의 안내에 마음을 바꿨다. 메인홀의 오른편 좌석은 과연 명당이었다. 야외에 있는 모닥불을 추위 걱정 없이 차창 너머로 감상할 수 있었다.
야외 선큰의 모닥불 좌석. 메인홀 오른쪽 좌석에서도 차창 너머로 ‘불멍’을 즐길 수 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초심자는 ‘거장’- ‘매니저 추천’ 코너부터
“매니저 10명이 취향껏 매달 추천작을 골라 전시해둡니다. 책을 고르기 힘들면 매니저 추천 코너부터 둘러보세요. ‘거장’ 코너에도 익숙한 작품이 많을 겁니다.”
그래픽 바이 대신은 국내외 만화, 그래픽 노블, 아트북 등 2000여 권을 갖추고 있다. 3월 정식 오픈에 맞춰 2층에 어린이 전용 공간을 준비 중이다. 구비 도서도 3000여 권까지 늘려갈 예정이다. 본점처럼 위례점도 주제별로 작품을 분류해뒀다. 메인홀 정면의 ‘거장’ 코너를 비롯해 ‘철학’ ‘문학’ ‘순정만화’ ‘직업만화’ ‘일상·힐링·성장’ ‘코메디’ ‘음식’ ‘성인’ ‘코메디’ 등이 있다.
만화뿐 아니라 A3 용지 크기의 작품 같은 아트북도 곳곳에 비치돼 있다. ‘건축’ ‘디자인’ 코너에는 ‘폼페이’ ‘자하 하디드’ ‘왕의 스타일’ ‘제임스 터렐’처럼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아트북으로만 책장을 꾸몄다. ‘스포츠·아웃도어’ 코너에선 레이싱을 소재로 한 만화와 관련 아트북을 함께 즐길 수 있다.
주제별로 그래픽 노블, 아트북, 만화 시리즈 등을 모아둔 구성에 대해 백재훈 그래픽 대표는 “한 분야를 다룬 여러 장르의 작품을 두루 접하면서 관심사를 파고드는 계기를 선물하고 싶었다”고 했다.
“만화는 작가들이 좋아하는 것을 깊게 파고들고 자유롭게 표현하기에, 무언가 습득할 때 참고하기 좋은 장르 같아요. 그래서인지 만화로 어떤 분야에 대한 생각이 바뀌거나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되는 경우가 많죠. ‘미스터 초밥왕’을 보고 초밥에, ‘신의 물방울’을 보고 와인에 입문하게 되는 것처럼요.”
오랜 기간 사랑받아온 작품을 모아둔 ‘거장’ 코너. 이설 기자 snow@donga.com 방문객 상당수는 거장 코너부터 발걸음했다. ‘우주소년 아톰’ ‘블랙잭’ ‘드래곤볼’ ‘닥터슬럼프’ ‘슬램덩크’ ‘시마 시리즈’ ‘배가본드’…. 오랜 기간 사랑받은 작품들을 한데 모아둔 공간이다. 순정만화 코너의 ‘꽃보다 남자’ ‘나나’와 음악 코너의 ‘피아노의 숲’ ‘노다메 칸타빌레’ ‘오디션’, 음식 코너의 ‘미스터 초밥왕’ ‘맛의 달인’ ‘심야식당’ 등 눈에 익은 작품으로 자꾸 손이 간다. 방문객들은 보통 동행인의 추천작이나 학창시절 추억이 깃든 작품으로 시작해 조금씩 독서 외연을 넓혀간다고.
“이왕 멀리 발걸음했으니 낯선 작품에 도전해 보라”는 홍 매니저의 조언에 따라 아는 작품과 모르는 작품을 두서없이 세 권씩 뽑아 들었다. ‘반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 ‘도라에몽테마걸작선’ ‘인간실격’ …. 책장을 펼치자마자 뭘 해도 신통치 않던 집중력에 간만에 힘이 실린다. 마음에 드는 대사를 휴대전화에 담다보니 ‘그때 그 작품들’이 하나 둘 떠오른다. 10대 시절 잔소리처럼 들리지 않게 어른의 세계를 슬쩍 보여줬던 건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아닌 만화 주인공들이었다.
“소설 음악 영화 모두 좋아하지만 만화를 가장 애정해요. 만화를 무시하는 시선이 있는데, 가장 수준 높은 만화가 수준 높은 영화나 드라마보다 뒤처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만화에서만 표현할 수 있는 액션씬, 감정선 같은 것들이 있죠. 그래픽 바이 대신에선 눈 감고 집어 들어도 볼 만한 작품들만 엄선했습니다.”(백재훈 대표)
“중학교 때까지는 시험 기간이 끝나면 ‘나나’ ‘궁’ 같은 순정 만화를 빌려보는 즐거움이 컸어요. 집 근처에 그래픽 바이 대신이 생겨서 오랜만에 만화와 다시 조우했는데, ‘시마 과장’ 같은 일본 만화를 주로 보고 있습니다. 회사에서 일본 분들과 일하는데, 그들의 문화와 생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돼서 좋아요.”(안혜리·37세)
“책과 카페를 좋아하는데 탁 트인 공간이 마음에 들어서 방문하게 됐어요. 앤디 워홀의 일대기를 읽다가 이것만 붙들고 있기엔 시간이 아까워서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집어 들었어요. 음악을 하는 사람인데, 음악 코너가 따로 있어서 설렙니다.”(백진희·50세)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