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유산 지킴이들] 〈7〉 궁궐해설사 천대중-성현희
창덕궁서 5000번 넘게 역사 설명… 해외 국빈들도 귀 쫑긋 세워 경청
구름에 달 가리면 궁궐속 달을 세
“관람객 경험은 해설사 입에 달려”
창덕궁의 베테랑 해설사인 천대중(왼쪽) 성현희 씨는 “궁궐을 집처럼 다니면서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까지 눈여겨보게 됐다”고 했다. 수령 750년이 넘은 궐내각사 향나무는 “2010년 태풍 곤파스로 윗부분이 잘린 뒤 ‘동궐도’ 속 모습과 똑같아졌다”고 설명했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우엽진주산(雨葉眞珠散). ‘비 맞은 연잎에 진주가 흩어진다….’ 창덕궁 후원 연못가의 ‘애련정(愛蓮亭)’ 기둥엔 이런 글귀가 걸려 있어요. 평생 연꽃을 사랑했던 숙종 때에 지어진 정자인데, 여기서 바라본 여름 풍경은 일품이지요.”
22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 해설사의 설명을 듣자, 머릿속에서 시원한 빗방울이 알알이 흩어졌다. 등줄기를 볶아대던 더위가 싹 가시는 듯했다.
우리나라 궁궐이나 왕릉, 종묘 등에 가면 쉽게 마주치는 풍경이 있다. 뙤약볕이나 추운 날씨에도 열정 넘치게 설명하는 ‘해설사’들이다. 특히 한국 문화가 낯선 외국인에겐 더없이 소중한 존재들. 창덕궁에서 20년 넘게 우리 역사와 문화를 알려온 성현희, 천대중 궁궐 해설사를 만나봤다. 두 사람이 마이크를 잡은 횟수는 어림잡아도 5000번을 훌쩍 넘는다고 한다.
창덕궁은 경복궁과 더불어 국빈이 가장 많이 찾는 곳. 성 해설사와 천 해설사는 각자 유창한 일본어, 중국어를 무기로 외국 정상 및 장관 등을 상대해 왔다. 이들의 유려한 해설에 시간을 1분 단위로 쪼개 쓰는 국빈들도 귀를 쫑긋 기울인다.
천 해설사는 특히 2014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가 방문했던 때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는 “예정된 일정을 10여 분 늦추면서까지 해설을 다 듣고 가셨다”며 “보통 국빈들은 말을 아끼는데, 악수를 청하며 ‘정말 좋았다’ 하셨던 것이 떠오른다”고 했다.
궁궐에서의 시간은 해설사들의 한마디에 분위기가 바뀐다. ‘창덕궁 달빛기행’은 봄가을 티케팅 전쟁이 벌어지는 인기 프로그램. 하지만 짙은 구름이 달을 가리는 날이면 곳곳에서 아쉬운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럴 때면 천 해설사는 밤하늘 대신 인정전의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를 가리킨다.
“달 모양, 담장 등 궁궐에 숨은 달의 개수를 함께 세어요. 관람객의 경험은 결국 해설사 입에 달렸지요. 창덕궁에 방문하기 가장 좋은 때를 물으실 땐 언제나 ‘오늘’이라고 말씀드립니다.”
그렇다고 해설사를 ‘말주변’으로 버티는 직업으로 여기면 곤란하다. 프로그램 기획부터 자료 조사, 시나리오 작성, 홍보물 번역·감수까지 도맡는다. 1830년대 창덕궁을 기록한 국보 ‘동궐도(東闕圖)’에 그려진 나무 4000그루에 얽힌 궁중 문화를 설명하는 ‘동궐도와 함께하는 창덕궁 나무 답사’는 바로 성 해설사가 기획과 진행 등을 맡은 스테디셀러다.
“조선 궁궐 중에 경관림을 가장 잘 간직한 곳이란 점에 착안했습니다. 더 깊이 있는 해설을 위해 숲 해설사 국가전문자격증도 땄어요. 최근엔 관련 대학 강의도 듣고 있습니다.”
요즘은 K콘텐츠 열풍 덕에 외국인 관광객이 부쩍 늘어났다. 특히 휴대전화를 들고 실시간 인공지능(AI)을 돌려 해설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는 이들이 많다. 천 해설사는 “내가 말하는 한마디 한마디에 더 큰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현장에 있어 보면, (외국인들이) 한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도 커졌지만, 동시에 시샘 역시 늘어난 걸 느껴요. 예컨대 온돌을 설명할 땐 일본 다다미나 중국식 온돌과 다르게 발전한 지리적, 문화적 배경을 정확하게 설명해야 합니다. 덕분에 평일 밤이나 주말에도 논문이나 자료에 ‘파묻혀’ 살고 있어요.”
1년 365일 고생스러운 일이건만 해설사들을 지탱하는 버팀목은 뭘까. 두 사람은 조선 정조 때 창덕궁 규장각의 초대 검서관(檢書官)이던 실학자 이덕무(1741∼1793)를 거론했다. 책을 너무 사랑해 ‘간서치(看書癡·책만 읽는 바보)’라 불렸던 인물이다.
“규장각에 가면 책을 마음껏 읽을 줄 알았더니, 필사하고 자료 찾으며 격무에 시달리느라 이덕무가 슬퍼했다는 야사(野史)가 있습니다. 쏟아지는 논문들 읽느라 가족에게 핀잔을 듣기도 해요. 하지만 열 번 해설해서 한 번이라도 관람객들 마음에 닿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을까요,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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