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 대화재의 나비효과? ‘연극+발레’로 탄생한 뮤지컬[브레인 아카데미 플러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28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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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뮤지컬의 브로드웨이 제패… 비영어권 작품으론 놀라운 일
美 첫 뮤지컬은 ‘더 블랙 크룩’
1866년, 연극에 발레 공연 짜깁기… 호평과 혹평 속 474회나 공연

《궁금하다 생각했지만 그냥 지나쳤던, 하지만 알아두면 분명 유익한 것들이 있습니다. 과거의 역사적 사건일 수도 있고 최신 트렌드일 수도 있죠. 동아일보는 과학, 인문, 예술,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오∼ 이런 게 있었어?’라고 무릎을 칠 만한 이야기들을 매 주말 연재합니다. 이 스토리들은 다음주 목요일 채널A의 지식퀴즈쇼 ‘브레인 아카데미’에서 보다 재미있고 흥미롭게 만날 수 있습니다. 기사를 미리 읽은 분이라면 방송 중 퀴즈가 나올 때마다 자신있게 “정답”을 외쳐보세요.》


8일 미국 뉴욕에서 열린 제78회 토니상 시상식에서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작품상을 비롯 6개 부문을 수상했다. 뉴욕=AP·뉴시스
“한국은 미국 엔터테인먼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4대 상을 모두 석권했다.”

서울 대학로 소극장에서 시작된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8일 토니상 6개 부문을 휩쓸자 영국 BBC 방송은 이렇게 ‘K컬쳐의 파워’에 대해 다시 한번 놀라움을 표시했다. 미국 4대 엔터테인먼트상으로 불리는 그래미상(1993년 소프라노 조수미) 오스카상(2020년 ‘기생충’) 에미상(2022년 ‘오징어 게임’)에 이어 K뮤지컬이 미 브로드웨이까지 제패한 것이다.

‘공연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토니상은 미 뮤지컬 및 연극계 최고 권위 상이다. 뮤지컬 장르 자체가 미국적인 것이어서 영어권이 아닌 독일, 프랑스 작품이 토니상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한국 창작 뮤지컬이 작품상, 연출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음악상, 무대디자인상까지 6개 상을 거머쥐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한국 뮤지컬 시장은 미국 영국 일본에 이어 세계 4위 매출 규모(2024년 기준 연 4651억 원)로 성장해 뉴욕 브로드웨이도 무시 못하는 시장이 됐다. 공연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2023년부터 공연 시장 매출 규모는 영화 시장을 넘어섰다. 지난해 공연 시장 매출액은 영화보다 2500억 원이 더 많았는데, 전 세계가 열광하는 K팝 콘서트 다음으로 매출액이 큰 뮤지컬의 약진 덕분이다.

한국 창작 뮤지컬은 각각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명성황후’ ‘난타’의 해외 진출을 시작으로 ‘위대한 개츠비’와 ‘마리 퀴리’가 브로드웨이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장기 공연에 성공했다. ‘팬레터’ ‘레드북’ ‘유앤잇’ ‘인사이드 윌리엄’ 같은 작품도 해외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 브로드웨이 뮤지컬 탄생은 우연? 필연?

전 세계 뮤지컬 중심지 브로드웨이에는 42개 대형 극장이 있다. 오프브로드웨이까지 합치면 400개 넘는 공연장이 몰려 있다. 극장에서 펼쳐지는 뮤지컬은 눈을 즐겁게 하는 스펙터클한 춤과 마술 같은 무대, 귀에 쏙쏙 박히는 뮤지컬 넘버(노래), 그리고 가슴을 울리고 웃기는 스토리로 대중을 열광시킨다.

브로드웨이에서 연기와 음악, 춤이라는 세 요소를 갖춘 최초의 뮤지컬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국내 대표적인 뮤지컬 음악감독 겸 지휘자 김문정 감독은 “최초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우연히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시대를 풍미하는 명작이나 예술 장르는 실수에서 탄생하기도 하는 법이다.

1866년 9월 뉴욕 니블로스 가든에서 초연된 브로드웨이 최초 뮤지컬 ‘더 블랙 크룩’ 포스터와 이 공연에 우연히 출연하게 된 프랑스 발레단원들(사진 위쪽부터). 위키피디아 커먼즈
1866년 여름. 브로드웨이 3000석 규모 공연장 니블로스 가든에서는 연극 작품 초연이 준비되고 있었다. 작가 찰스 M 바라스가 쓴 판타지 멜로드라마 ‘더 블랙 크룩’이었다. 흑마법사를 주인공으로 미녀와 영웅이 등장해 악마와의 계약 같은 어두우면서도 환상적인 스토리를 담은 작품이었다.

그때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생기기 전까지 뉴욕 최고 오페라하우스로 명성을 떨치던 극장 아카데미 오브 뮤직에서 큰불이 났다. 이곳에서는 당시 프랑스 발레단이 개막을 불과 며칠 앞두고 화려한 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극장이 전소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발레단 무용수가 다치거나 죽지는 않았지만 의상과 장비 일부가 탔다. 미 순회공연을 계획하고 있던 프랑스 발레단은 공연장을 잃고 해산 위기에 처했다.

‘더 블랙 크룩’ 공연에 넣을 만한 볼거리가 더 없을까 고민하던 극장장 겸 제작자 윌리엄 휘틀리는 이 소식을 듣고 기상천외한 결단을 내린다. 연극이 진행되는 도중에 발레단 공연을 넣자는 결정이었다.

1866년 9월12일 니블로스 가든에서 초연된 ‘더 블랙 크룩’에는 중간중간 요정, 마법, 지옥, 궁전 같은 장면을 상징하는 발레 공연이 들어갔다. 노출이 심한 의상을 입은 100명 넘는 무용수들의 춤은 환상적이고 화려했다. 관객들은 발레와 음악, 연극, 마술이 한꺼번에 나오는 쇼에 열광했다. 그러나 일부 언론과 종교인들은 내용이 엉성하고 의상과 노래는 선정적이라며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미국 소설 거장 마크 트웨인은 “이것이 바로 아라비안나이트(천일야화)의 경이로움이 실현된 것”이라고 호평했지만, 영국 소설 대가 찰스 디킨스는 “연극과 발레의 조화가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다. 미 일간 뉴욕헤럴드는 맨다리가 드러나는 의상과 외설적인 춤에 대해 “소돔과 고모라에 있었을 법한 볼거리가 브로드웨이에 등장했다”고 악평을 퍼부었다.

이런 논란은 대중이 더 관심을 갖게 만드는 광고 효과로 이어져 ‘더 블랙 크룩’은 엄청난 흥행을 거뒀다. ‘더 블랙 크룩’은 1866년 초연 후 474회나 공연되며 매진 사례를 이어갔다. 이후 수십 년간 지방 투어와 재공연을 했고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뮤지컬 넘버 ‘You Naughty, Naughty Man(당신은 장난꾸러기, 나쁜 남자야)’는 20세기 들어서까지 불려졌다. 미 공연·극장 역사가 제럴드 보드먼은 “‘더 블랙 크룩’으로 브로드웨이 뮤지컬 극장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평했다.

동서양에서 노래하면서 이야기(연극)를 풀어가는 공연 장르는 판소리, 오페라, 경극 등 다양하다. 그럼에도 미국에서 등장한 뮤지컬이 단번에 사람들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수십 명에서 100명 가까운 댄서들의 스펙터클한 안무다. 차이콥스키 발레 ‘백조의 호수’ 실질적인 주인공이 무대를 꽉 채운 호숫가 백조들의 춤인 것처럼,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 잘 드러나듯 반짝이 의상을 입은 코러스들의 화려한 춤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트레이드마크다.

● 뮤지컬이 코미디인 이유

미국에서 뮤지컬은 ‘뮤지컬 코미디’로 불린다. 왜 코미디가 붙을까? 뮤지컬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귀족 오페라에 대한 반발로 유럽에서 태동한, 유머와 위트와 풍자 가득한 희가극(喜歌劇)이 있기 때문이다.

오페라는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귀족 문화와 성악 중심 서사극이다. 반면 1728년 런던 리처드 스틸 극장에서 초연된 희가극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는 유행하던 이탈리아식 고전 오페라를 조롱하고 패러디한 대중문화의 반란이었다. 주인공은 귀족이나 영웅이 아니라 도둑, 창녀, 사기꾼, 부패한 정치인, 하층민이었고 고급스런 성악 대신 대중에게 친숙한 민요, 유행가, 댄스곡 선율을 사용했다. 주인공인 도적 두목 매키스는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며 체포와 탈출을 반복한다. 18세기 영국 정치계와 법조계의 부패와 위선, 계급 불평등을 한껏 풍자한 장면에 관객은 깔깔대고 웃었다. 초연 당시 62회 연속 공연된 이 작품은 엘리트 예술 오페라를 ‘대중을 위한 오페라’로 변신시켰다.

이 작품은 200년 뒤인 1928년 독일 베를린에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푼짜리 오페라(Die Dreigroschenoper·The Treepenny Opera)’로 부활했다. 주인공이던 매키스는 ‘칼잡이 맥’으로 바뀌었다. 작곡가 쿠르트 바일은 재즈, 왈츠, 탱고 같은 당시 현대음악을 활용해 노래를 만들었다.

결국 유럽에서 오페레타, 발라드 오페라, 징슈필(Singspiel·연극 중간에 노래와 춤, 기악곡이 삽입되는 독일 대중 음악극) 등으로 불리던 희가극이 미국에 들어와 현대적이고 상업적인 뮤지컬 장르로 확립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박천휴(극본)와 윌 애런슨(작곡) 콤비의 ‘어쩌면 해피엔딩’도 미래에 버려진 로봇들이 디스토피아적 현실을 풍자하지만 비극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반딧불이를 보러 제주의 숲을 찾아가는 주인공 로봇들의 아련하고 따뜻한 감성이 세계인 가슴에 닿은 듯하다. 어쩌면, 해피엔딩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이 담긴.


QR코드를 스캔하면 26일 채널A에서 방송된 브레인 아카데미 ‘역사편’ 관련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음악편’은 7월 3일 오후 10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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