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는 베스트셀러. 창작자들은 자신이 만든 콘텐츠가 베스트셀러가 되길 꿈꾸지만,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이 희귀한 확률을 뚫고 베스트셀러가 된 콘텐츠가 탄생한 과정을 들여다본다. 창작자의 노하우를 비롯해 이 시대 사람들의 욕망, 사회 트렌드 등을 확인할 수 있다.
키 145㎝에 몸무게 56㎏로 비만인 초등학교 5학년 현주. 급식을 두 번이나 먹지만 금방 배고프다. 우연히 발견한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배 빵빵 아이스크림’을 먹은 후 식욕이 사라졌다. 살은 쑥쑥 빠졌다. 난민 같다는 걱정까지 듣게 됐지만 좋았다. 한데 노래를 부르려 해도 소리가 잘 나오지 않고 자꾸 짜증이 났다. 울상이 된 현주는 엄마가 만든 닭죽을 먹자 입맛이 돌아온다. 예전 모습이 된 현주는 살 쪘다고 놀리는 아이에게 성악가가 되려면 든든하게 먹고 체력을 키워야 한다고 당차게 말한다.
2023년 출간된 ‘이상한 무인 가게 아이스크림’(라곰스쿨) 속 이야기 중 하나다. 학원을 많이 다녀 힘든 소미가 ‘거울 아이스 찹쌀떡’을 먹자 자신과 똑같은 아이가 생겨나 대신 학원에 다니고 숙제도 해준다. 이어 출간된 ‘이상한 무인 문구점’(2023년), ‘이상한 무인 편의점’(2024년), ‘이상한 무인 사진관’(2024년)에서도 아이들은 각자의 고민을 해결한다.
‘이상한 무인 가게’ 시리즈 4권의 누적 판매량은 최근 10만 권을 넘었다.(국내 출판계의 베스트셀러 기준은 책 판매량 1만 권이다.) 창작 동화로는 이례적인 기록이다. 다섯 번째 책인 ‘이상한 무인 라면 가게’가 이달 7일 나왔다. 시리즈는 대만에 5권 모두 판매됐다. 저자는 검사 출신 변호사인 서아람 작가(39)다. 서 작가와 최지연 라곰스쿨 대표(43)를 경기 수원시 서아람법률사무소에서 8일 만났다.
서 작가는 “어릴 때부터 추리 소설을 엄청 좋아했고 글쓰기를 재미있어 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법대를 나온 서 작가는 10년간 검사로 일하다 2022년 변호사 개업을 했다. 소설(‘암흑 검사’, ‘검사님의 보육일지’, ‘왕세자의 살인법’ 등)을 쓰고 공저 에세이(‘여자, 사람, 검사’)를 냈다. 서 작가를 눈여겨본 최 대표는 동화를 써보면 좋겠다고 2022년 제안했다.
“서 작가님은 흡입력 있게 이야기를 쓰는 솜씨가 탁월해요. 어린이책을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작가님이면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서 작가는 흔쾌히 수락했다.
“초등학교 1학년 아들, 7살 딸을 키우고 있는데요, 더 크면 제가 쓴 책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제가 검사 시절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했는데 아이들은 ‘뽀로로 보면 안 돼?’라며 관심이 없더라고요.(웃음)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책을 통해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최 대표에 대한 믿음도 있었다.
“웹소설을 종이책으로 만들면 원고를 그대로 묶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런데 최 대표님은 내용을 일일이 확인하고 덜어낼 부분은 빼는 등 공들여서 완성도를 높이시더라고요. 이런 분이라면 함께 작업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둘은 머리를 맞대고 회의했다. 책은 꾸준히 낼 수 있게 시리즈물로 정했다. 아이들에게 친숙하면서도 새로운 공간을 배경으로 하기로 했다. 서 작가는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를 떠올렸다.
“변호사가 된 직후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훔친 초등학생을 상담하게 됐어요. 아이 어머니는 ‘체크카드도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으셨죠. 아이에게 물어보니 ‘가게를 지키는 사람이 없는데 아이스크림을 훔치면 알아챌까 궁금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들에게 무인 가게는 사람이 없는데 물건이 팔리는 신기한 곳이자 양심의 시험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내용은 단조로워, 고민을 들어주되 결국 아이 스스로 이를 해결해나가는 구조로 바꿨다. 물건은 돈을 내는 대신 장기 자랑, 게임 등을 해서 가진다. 가게는 오래 전 ‘이팔청춘 불로장생 아이스케-키’를 훔쳐 먹은 남자 아이가 계속 소년의 모습을 한 채 그림자라는 존재의 지시를 받아 운영한다. 서 작가는 “물건에 대한 정보를 줘야 하기 때문에 남자 아이가 스피커로 아이들과 대화하는 방식으로 설정했다”고 말했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말투, 행동을 담아 현실감을 높였다.
“학교 폭력, 아동학대 사건을 담당하면서 아이들을 많이 만났어요. 요즘 아이들은 굉장히 논리적이고 성숙해요.”
서 작가는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아이들의 고민을 목록으로 만들었다.
“작가님에게 동화 작법 참고용으로 ‘이상한 과자 가게 전천당’ 시리즈 중 한 권을 드렸는데요, 밤새 책 내용 모두를 타이핑하고 이야기 구조는 물론 글자 수까지 세면서 분석하셨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서 작가는 “한 번 꽂히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인다”며 웃었다. 하지만 첫 원고는 완전히 다시 써야 했다.
“교훈을 강조하며 글에 힘이 많이 들어가 있더라고요.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고 합의했기에, 조심스럽지만 작가님에게 다시 써 달라고 했어요. 그림을 그린 안병현 작가님이 어린이책에 대해 꼼꼼하게 조언해 주시기도 했고요.”
서 작가는 시원하게 받아들였다.
“다른 사람이 읽지 않는 글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요. 글은 대표님이 전문가니까 따라야죠.”
‘이상한 무인 가게’ 시리즈를 쓴 서아람 작가. 동아일보 출판사진팀책에는 서 작가의 어린 시절도 일부 반영돼 있다.
“고등학교 때 몸무게가 80㎏이 넘었어요. ‘이상한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눈이 작아서 고민인 아이도 나오는데요, 제가 쌍꺼풀 수술을 하기 전에 실눈이었어요. 사진사 아저씨가 ‘눈 감지 말고 떠야지’라고 했을 정도였죠.”
첫 책에 1권이라는 번호는 넣지 않았다. 최 대표는 “1권이 잘 안 되면 2권은 내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평단을 모집하고 소셜 미디어와 육아 카페 등에 홍보했다. 독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나며 판매에 탄력이 붙었다. 엄마 없이 혼자 등하교 하는 걸 겁내는 아이, 치과 가기 무서워하는 아이 등 주위에서 각종 고민 제보(?)가 쏟아졌다. 이를 반영해 후속 책을 썼다. 독자들은 “아이가 책을 정말 재밌게 본다”, “자기와 비슷한 고민을 다룬 내용에 흥미로워한다”는 리뷰를 올렸다. 최 대표는 “2~3년 사이에 종류별 무인 가게가 많이 생겨 독자들이 친숙하게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서 작가는 “시리즈 저작권의 절반은 대표님이 가져야 한다”며 웃었다.
‘이상한 무인 라면 가게’는 책에 나오는 라푼젤면, 수달 라면 그림을 넣은 라면을 책과 같이 포장해 교보문고와 영풍문고 오프라인 서점에서 판매하고 있다. 온라인 교보문고와 협업해 라면 그릇 굿즈도 만들었다.
‘이상한 무인 라면 가게’를 읽은 어린이 독자가 그린 나만의 라면. jjhy1517 제공서 작가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왕따를 1년간 당한 적이 있다. 이 경험도 시리즈에 녹아 있다.
“저를 왕따 시킨 일진 아이들이 없는 곳에서 지내고 싶어 이 악물고 공부했어요. 지금은 힘들고 불행하게 느껴지는 일도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인생인 것 같아요.”
서 작가는 어린 시절 드라마 ‘판관 포청천’을 보며 판결에 관심을 가졌고 드라마 ‘애드버킷’ 에서 배우 송유나가 연기한 검사가 멋져 검사를 꿈꿨다. 책은 무척 좋아했다.
“세 살 위인 오빠는 저랑 안 놀아줬어요. 외로웠지만 책을 읽으면 즐거운 여행을 떠나는 것 같았어요. 형편이 빠듯한데도 부모님은 읽고 싶은 책을 다 사주셨어요. 대학생이 돼 집에 있는 책이 3000권이 넘는 걸 보고 가슴이 찡했습니다.”
친구가 발레를 배우는 걸 보고 자신도 하고 싶다고 조른 적도 있다.
“어머니가 ‘너는 팔다리가 짧아 발레를 잘 하기 어렵다. 우리집은 발레를 할 형편도 안 되고. 꼭 배워야 하는 게 수영, 서예, 글쓰기인데 이중 골라 봐라’고 하셨어요. 글쓰기를 선택하니 동네 유치원 원장님 딸인 문예창작과에 다니는 언니에게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2년간 글쓰기를 배우게 해주셨어요. 어머니가 문학 소녀였거든요. 동시, 소설 등을 썼고 언니가 제 글을 타이핑해 문집을 7권 만들어 줬어요. 신기하고 벅찼습니다.”
중고등학생 때는 그룹 H.O.T. 팬픽(팬 픽션의 준말로 팬이 쓴 소설)을 썼고 PC통신에 애니메이션 패러디물을 올렸다. 대입준비를 하고 검사가 돼 바쁘게 일하며 10년 넘게 글을 쓰지 않았다. 한데 결혼 후 난임 치료를 받으며 깊은 우울증을 겪었다. 변호사인 남편이 “뭐라도 해 보라”고 당부해 문화센터에서 글쓰기 수업을 들은 후 2018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썼다. ‘검사님의 보육일지’, ‘왕세자의 살인법’은 드라마 제작이 확정돼 캐스팅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암흑 검사’도 드라마 판권이 팔렸다. 그가 쓴 책은 20권이 넘는다.
‘이상한 무인 가게’ 시리즈를 쓴 서아람 작가. 그가 쓴 소설, 에세이책과 함께 했다. 서아람 작가 제공“글을 쓰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힐링이 돼요. 스스로 성장하는 게 느껴지고요. 끙끙대며 쓴 건 100% 재미없더라고요. 망한 책도 많아요.(웃음) 안 써지는 글은 빨리 접습니다.”
법조인으로, 엄마로, 작가로, 1인 3역이 벅차진 않을까.
“변호사가 되니 제 시간을 조절할 수 있어요. 하루 7시간 이상 잡니다. 필라테스도 매일 하고요.”
최 대표는 서 작가를 만난 게 행운이라고 했다.
“제가 생각한 게 글로 구현되고, 그 이상의 결과물이 나와 놀랍고 재밌어요. 다양한 책을 같이 내고 싶어요.”
서 작가는 쓰고 싶은 걸 20분의 1도 못 썼단다.
“검사, 변호사를 하며 흥미로운 사건과 사람을 많이 만나 글쓰기에 더없이 좋아요. 이상한 무인 가게 시리즈는 종류별 가게가 생각날 때까지 쭉 쓰고 싶습니다.”
■‘이상한 무인 가게’(라곰스쿨·2023년부터) 시리즈는….
아이들이 특이한 무인 가게에 들어가면서 고민을 해결하게 되는 내용을 그린 동화다. ‘이상한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를 시작으로 ‘이상한 무인 문구점’, ‘이상한 무인 편의점’, ‘이상한 무인 사진관’, ‘이상한 무인 라면 가게’까지 5권이 나왔다.
똑똑해지고 싶은 지성이는 무인 라면 가게에 들어가 ‘교양이 쑥쑥 자라면’을 먹은 후 역사, 시사 상식을 척척 말하게 된다. 퀴즈 대회 결승까지 올라가지만 수학 문제를 못 풀어 우승하지 못한다. 항의하러 라면 가게에 다시 갔다가 수학, 과학, 한자 등을 다 잘하려면 각각의 라면을 모두 먹어야 하는데다 한 그릇당 가격이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한데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 다양한 지식을 얻게 된다는 걸 알게 된다.
자기도 모르게 자꾸 거짓말을 하는 은찬이는 ‘진실의 참이라면’을 먹은 후 사실만 말하게 되면서 속내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는 걸 깨닫는다.
공부 잘하는 누나와 비교당하던 라온은 시험 답안을 척척 쓰는 샤프를, 밤만 되면 무서운 이야기가 생각나는 다운은 자신감을 주는 보조배터리를 각각 갖게 된다. 하지만 이런 물건 없이도 혼자 해나가는 법을 터득해 나간다.
가게는 수십 년 전 ‘이팔청춘 불로장생 아이스케-키’를 훔쳐 먹은 남자 아이가 계속 소년의 모습을 한 채 그림자의 지시를 받아 운영한다. 아이들과는 스피커로 대화하며 제품에 대해 설명한다. 제품은 돈 대신 장기 자랑, 비밀 얘기, 게임 등을 통해 가질 수 있다.
친근한 공간을 배경으로 아이들이 실제 고민하는 여러 문제를 현실감 있게 그렸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자신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주인공을 만나면 공감하게 된다. 아이들이 어떤 문제로 속앓이 하는지도 엿볼 수 있다. 아이들은 신비한 물건이나 먹거리로 쉽게 고민을 해결하는 것도 좋지만 그게 능사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를 이겨내는 힘은 자기 안에 있다는 걸 자연스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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