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같은 틈새 여유 시간. 막상 갈 곳을 몰라 허비하기 쉽지요. 편안한 휴식도 좋지만 때론 낯선 공간이 주는 활력이 필요합니다. 숨은 보석 같은 공간에서 짧지만 확실한 충만을 만끽해 보세요.
대화 금지 규칙… 서울 아현동 소재 주문할 때 말고는 필담(筆談) 원칙 ‘침묵 만끽’ 낯선 경험이 오감 일깨워 “타인 배려하는 내 모습 마음에 들어”
소리에 이토록 집중한 적이 있었던가. 음악, 그라인더 소리, CD 넣는 소리, 물 따르는 소리, 물 끓는 소리, 커피가루 닦아 내는 소리, 키보드 소리, 의자 끄는 소리,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카페 침묵’에 머문 4시간 동안 온 에너지를 청각에 집중했다. 기자, 카페 대표, 다른 손님 3명이 함께 머문 2시간여 남짓. 오가는 대화는 없다. 감기에 걸린 기자는 침묵 속에서 코를 풀 엄두가 나지 않아 조심스레 콧물을 휴지로 찍어 눌렀다.
이달 중순 서울 서대문구 지하철2호선 아현역 인근 좁다란 이면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짙은 초록색 철제 문이 나왔다. 문에 경고장처럼 붙은 안내문이 눈에 띈다. ‘이곳은 대화금지 카페입니다’. 지난해 문을 연 카페 침묵의 규칙은 하나, 침묵이다. (주문할 때를 제외하곤) 말소리를 내면 안 된다.
대화 금지 공간인 ‘카페 침묵’ 입구. ‘이곳은 대화금지 카페입니다’라고 적은 종이가 문에 붙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커피 향, 나무 향, 책 내음, 음악 소리가 은은하게 번진다. 2인용 테이블 6개, 음악 듣는 좌석 하나, 바 좌석 하나로 구성된 아담한 공간. 창가 자리에 앉으니 정윤영 대표가 자세한 안내서를 가져다 준다. 골목 뷰(view)를 마주하고 안내서를 열자 단정한 손글씨가 빼곡하다. 첫 장에는 ‘침묵’을 선택한 이유가 고백처럼 담겼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앞에 놓고 조용히 책 읽는 걸 가장 좋아합니다. …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옆자리 손님에 따라 그날의 카페는 천국이 되기도 하고 지옥이 되기도 합니다. … 이곳에 오면 반드시 조용히 쉴 수 있습니다. … 옆자리 손님이 적이 아니라 동지가 됩니다.’
‘카페 침묵’의 내부. 책, 커피, 음반을 두루 갖췄다. 조용한 공간을 위한 규칙도 적어뒀다. ‘주문/계산을 제외하고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귓속말도 X). 키보드/마우스/펜은 사용가능하지만 옆자리 손님이 신경 쓰이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화장실 위치, 물과 휴지가 놓인 곳, 추가금 이용 규칙, 와이파이 비번 같은 단골 질문도 상세히 정리해 뒀다. 대화 금지 공간에서 궁금증이 일면 손님들이 난처할 터. 편안한 침묵을 위해 반 보 앞선 배려다.
짐작하듯 이곳을 찾는 이는 보통 혼자다. 이날 카페에 머문 4시간 동안 방문한 손님 셋 모두 혼자였다. 일본의 ‘책읽는 가게’를 본떠 만든 공간으로, 입장료 1만 원에 이용시간 2시간과 음료 1잔을 준다. 연장 이용료는 1시간당 5000원. 안내서 맨 뒤엔 연필과 접착메모지가 붙어 있다. 대화를 건네고 싶을 땐 메모지를 쓰면 된다.
바 테이블 한 켠에 구비된 정윤영 대표의 ‘애착 책들’. 이 공간에서는 괜스레 침묵의 느낌에 귀를 열게 된다. 수동 커피 그라인더, 나무바닥을 스치는 발걸음, 골목을 오가는 오토바이, CD 바꿔 넣는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부드럽게 공간을 감싼 생활 소음을 ‘경청’하다 보니 어느덧 시간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새소리 물소리가 흐르는 숲속에 와 있는 듯하다.
카페 침묵의 주인공은 사실 음악이다. 오디오, CD, 커피 맛, 조용함 순으로 고려해 공간을 꾸몄다고 한다. 클래식 가요 팝 재즈를 다양하게 섞어 계속 CD를 바꿔 틀어 준다. 카페 한쪽엔 음악을 온몸으로 맞아야 할 듯한 좌석이 있다. CD 1500여 장이 빼곡한 진열장과 자비안 줄리에타 스피커, 마란츠 앰프를 마주한 1인석이다.
자비안 줄리에타 스피커, 마란츠 앰프를 마주한 음악 좌석. ‘내 눈을 봐요. 내 얼굴을 봐요. 안아 주기에도 우리 삶은 너무 짧잖아요. 우리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잖아요.…’ 정 대표가 건넨 한강 작가의 산문집(노래 CD 수록)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2007년)를 듣고 또 읽으니 이런 종류의 호사는 가끔 찾아서 누릴 만하다 싶다.
클래식 애호가인 정 대표는 무료로 클래식을 듣고 공부하는 ‘왕초보 클래식’ 행사도 연다. “덜 벌고 안 쓰는 그런 삶을 살아왔는데도 카페가 잘 안 돼서 한동안 마음고생이 심했어요. ‘카페 접을까?’ 했더니 친구들이 ‘한 게 뭐가 있다고 포기하느냐. 뭐라도 해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생각한 게 음악감상회예요.”
‘초대석’도 최근 신설했다. 커피 업계 인사들과 평론가들을 초청해 음악 이야기를 듣는 자리다. 송대웅 펠트커피 대표가 지난해 12월 14일 첫 무대에 섰다. 참가비는 1만 원이다.
바 좌석에 놓인 방명록을 펼치니 다녀간 이들의 마음이 인사를 건넨다. 카페 곳곳엔 사진, 영화, 음악 관련 책이 비치돼 있다. 한쪽 벽면을 채운 글귀들이 특히 눈길을 끈다. 쿠폰 10장을 모은 손님에게 주는 선물인데, 정 대표가 만년필로 좋아하는 책 구절을 필사했다. 손님은 많지 않지만 단골은 꽤 된다. 성향에 맞는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오기에 만족도가 높다고.
#1 하루 휴가를 낸 김에 방문했다는 20대 이민지 씨는 “조심조심하는 내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혼자 사는데 집에선 늘어져서 영상물을 본다면 이곳에선 책 읽고 일기 쓰고 생각해요. 그리고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는 제 모습에 묘한 만족감을 느껴요. 그간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내가 지금은 노력하고 있구나, 하는 거죠.”
#2 60대 최승이 씨는 “I(MBTI 내향형)인 데다가 주부인 나에게 최적인 공간인 것 같다”고 했다.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사람이라 조용한 곳을 찾아다녀요. 지켜야 할 게 명확하고 방해 요소가 없는 이곳은 이런 저에겐 최적의 공간이죠. 주부에겐 집이 일터라 나만을 위한 온전한 휴식을 취하기 힘들어요. 식사 준비 때문에 충분히 머물지 못했는데, 내일 오픈 시간에 맞춰 다시 오려고 합니다.”
#3 30대 설미소 씨는 “카페를 사색하고 작업하는 공간으로 잘 활용하는데, 조용해서 집중하기 좋았다”고 했다.
“매월 진행하는 무료 음악감상회로 처음 방문했는데, 좋은 음악을 공유하고자 하는 사장님의 태도가 고스란히 전해져 인상 깊었습니다. 옆 자리 손님이 동료가 될 수 있는 카페라는 콘셉트도 마음에 들었어요. 작업과 사색의 공간으로 딱이라고 생각합니다.”
창가 좌석에서 즐기는 ‘골목멍’도 새로운 기분을 선사한다. 대학 졸업 후 건축회사에서 밤낮없이 일하길 2년. 월급을 받으면 영화와 공연을 마음껏 즐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부족했다. 어느 날 10년 뒤에도 같은 공간에서 같은 구성원들이 치열하게 일하는 미래를 봤다. 3일 고민 끝에 회사를 그만뒀고 취미생활과 밥벌이를 동시에 해나갈 일터로 학원을 택했다.
본격적으로 영화평론을 공부하고 클래식 애호가로 활동하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후 학원 일이 줄면서 카페로 눈을 돌렸다. 커피, 책, 영화포스터, 음반, 고양이 소품, 사진집, 스피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만 채운 카페 주인은 평생의 로망이었다. 직업 만족도는 ‘최상’이라고.
“언제 오더라도 방해 없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어요. 침묵을 내세우니 제 입장에서 직업 환경도 좋습니다. 소위 ‘진상 고객’이 단 한 명도 없었고 방해하는 사람도 없죠. 모든 좌석이 다 찼는데 음악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순간엔 소름 돋는 쾌감을 느끼기도 해요. 모두가 같이 있는데 누구도 서로 방해하지 않는 순간이라니. 거기에 좋은 음악까지 흐르는 공간.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죠.”
몇몇 친구들은 침묵이라는 조건이 카페 문턱을 지나치게 높일 수 있다며 염려했다고 한다. 정 대표는 “운영이 힘들더라도 말 없는 공간이 카페 핵심이라서 그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며 “조용함을 싫어하는 분들이 그냥 들어오셨다가 당황할까 봐 안내문을 대문에 붙여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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