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같은 틈새 여유 시간. 막상 갈 곳을 몰라 허비하기 쉽지요. 편안한 휴식도 좋지만 때론 낯선 공간이 주는 활력이 필요합니다. 숨은 보석 같은 공간에서 짧지만 확실한 충만을 만끽해 보세요.
다도를 다룬 일본 영화 ‘일일시호일’의 한 장면. 영화사진진 제공
“커피 끊어도 세상 안 무너져”
저녁보다 더 저녁 같은 공간이었다. 검정 또는 짙은 회색을 띠는 바닥, 벽, 가구, 소품, 유니폼…. 침침한 공기를 더듬으며 ‘맥파이앤타이거 신사티룸’(이하 신사티룸) 들어서자 우주 등뼈 같은 거대한 테이블이 시야를 꽉 채웠다. 정갈한 다기와 맑은 차(茶)향을 눈과 코에 담자 첫 티테이스팅(tea-tasting)에 대한 기대감이 솔솔 올라왔다.
17일 찾은 신사티룸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 골목 작은 건물 2층에 자리하고 있다. 대중 공간인 ‘성수티룸’과 달리 이곳에선 티테이스팅, 티코스(종료) 같은 예약제 행사만 진행한다. 이대우 매니저는 “해가 거의 들지 않아 낮에도 어두컴컴하다”며 “칠흑 같은 공간에 유리 돌 금속 나무 같은 다양한 물성의 소품을 놓아 공간의 감도를 높였다”고 했다.
‘맥파이앤타이거 신사티룸’은 칠흑 같은 우주에 기물들이 둥둥 떠다니는 이미지를 떠올리며 꾸몄다고 한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언제부턴가 ‘식후 커피’ 공식이 흔들린다는 걸 느낀다. 점심 후 무작정 커피전문점으로 향하는 이들은 줄고 “커피 괜찮아, 아님 차가 좋아”라고 묻는 이들은 늘었다. 차 애호가가 하나둘 늘면서 생긴 변화다. 수면장애로 카페인을 피하려고, 차향이 좋아서, 속이 편안해서, 다양한 차를 고르는 즐거움에…. 입문 이유는 다양하다.
기자 역시 “커피 끊어도 세상 안 무너지더라”는 지인의 말에 차계(茶界)에 발을 담갔지만 취향을 몰라 답답했다. 그러던 차 티테이스팅 클래스에 대한 정보를 접하곤 ‘이거다’ 싶었다. 12종의 차를 시음하며 나만의 차 취향을 찾아보라는 설명. 차를 품평하는 어려운 자리가 아니라는 부연에 더 마음이 갔다.
맥파이앤타이거 신사티룸 티테이스팅에서는 12종의 찻잎을 블라인드로 맛볼 수 있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찻잎을 관찰하고 향을 맡고 맛을 본 뒤 첫맛과 끝 맛 등 향미를 기록해 주시면 됩니다. 마시면서 무슨 차인지 생각해보세요.”
박 부매니저의 안내에 종이와 연필을 쥐고 다기로 빼곡한 자리로 향했다. 언뜻 보면 비슷하지만 유심히 살피면 조금씩 모양과 색이 다른 찻잎들. 티백을 애용하다가 각양각색의 차 도구를 보니 과학 실험실에 온 듯하다. 물 150ml, 찻잎 3g. 2분 30초에 맞춰둔 타이머가 울리자 박 부매니저가 미간에 힘을 주며 조심스레 차를 내렸다.
참가자 4명이 부지런히 1~12번 차 사이를 오가며 시음을 시작했다. 기록에 대한 부담 때문인지 미각과 후각이 최대치로 열린다. 어떤 건 쉽고 어떤 건 아리송하다. 숲 향, 레몬 향, 카라멜 향, 꿀 향…. 눈을 감고 몰입하니 향미가 하나둘 더해지는 느낌이다. 마치 어른들의 촉감놀이 같다.
티테이스팅, 티코스 등 일상에서 차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 다양해지고 있다. 맥파이앤타이거 제공
당신의 차는?
‘1번: 쉽다. 녹차. 2번: 달달하고 향기로움. 홍차와 비슷. 3번: 레몬+솔잎 향. 캐모마일과 비슷. 4번: 숲향. 낯설다. 5번: 뾰족한 가시 같은 외양. 나물 맛. 6번: 확신의 홍차. 7번: 아는 맛인데 헷갈려. 8번: 우롱차. 9번: 우엉차 같다. 10번: 감잎차? 녹차? 11번: 쑥차! good. 12번: 대추 맛 나는데 감잎차?’
이어진 정답 기록지 공유 시간. 같은 차를 두고 감상이 다 달랐다. 내가 느낀 단맛이 누구에겐 쓴맛이었고, 누군가에게 꽂힌 꽃향이 내겐 파스 냄새처럼 거북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모두가 대략의 차 취향을 알게 됐다는 것.
1번부터 차례로 세작녹차, 운남백차, 목련현미녹차, 하동 헛개나무열매차, 호지차, 하동 잭살차, 야생 홍차, 보이숙차, 하동 우엉뿌리차, 감잎차, 하동 쑥차, 호박차. 이 가운데 보이숙차와 쑥차가 입에 딱 맞았다. 운남백차와 헛개나무열매차도 이날 참가자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다.
기자가 ‘레몬, 솔잎향, 캐모마일과 비슷’이라고 맛과 향을 기록한 3번 차의 정체는 목련현미녹차였다. 이설 기자 snow@donga.com 티테이스팅 목적은 크게 4가지다. 차를 섞어 향미를 찾기 위해서, 도매상이 소비자 취향을 찾기 위해, 소비자가 개인 기호를 발견하기 위해, 기존의 차와 비슷한 블렌딩을 하기 위해. 3, 4년 전쯤부터는 개인을 대상으로 한 티테이스팅이 늘고 있는 추세다. 커피 대세 시장에서 차의 존재감이 또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우 매니저는 “공간에 대한 관심과 오마카세 유행이 겹치면서 차 문화가 젊은 층 마음을 두드린 것 같다. 예전엔 북촌 한옥 찻집에서 마시는 인상이었다면 지금은 모던한 공간에서 혼자 시간을 즐기는 느낌으로 바뀐 것”이라고 배경을 짚었다.
맥파이앤타이거 성수티룸은 대중이 편안하게 차를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맥파이앤타이거 제공
‘노오력’하니 근사한 순간이…
신사티룸 관계자들은 티룸과 차의 매력을 묻자 ‘감도’ ‘오감’ 같은 단어를 자주 꺼냈다. 그러고 보니 티룸에는 돌(도자기·테이블 ·찻잔) 금속(주전자·커틀러리) 나무(디저트 플레이트·식물) 등 평소 접하기 힘든 물성이 고루 포진해 있었다.
가만히 테이블을 매만지고 커틀러리를 조물락거리니 그토록 ‘감각’을 강조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딱딱하고 차갑고 거칠고 또렷하고 희미하고 어슴푸레하고…. 애써 느끼고 그에 맞는 언어를 찾으려다 보니 잡념이 걷혔다. 그러다 아주 기분 좋은 순간이 찾아왔다.
시들해진 감각을 되찾는 순간은 근사했다. 인생 선배들이 자연으로, 다실로, 혹은 어디로든 나가는 이유가 있구나 싶었다. 이 매니저는 “속도가 강조되는 사회에서 차 한잔에 집중하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마른 잎과 온기와 습기를 머금은 찻잎 향, 그리고 우려진 차의 맛과 향에 집중하다 보면 묘한 위안을 얻게될 것”이라고 했다.
<찻잎 우리는 과정> △마른 찻잎을 관찰한다 △뜨거운 물을 부어 다관(찻주전자)을 데운 뒤 물을 비워낸다 △따뜻해진 다관 안에 마른 찻잎을 넣어 뚜껑을 닫은 뒤 흔든다 △습기와 온기를 머금은 찻잎의 향을 음미한다 △다관에 뜨거운 물을 붓고 기다린 다음 숙우(끓인 물을 식히는 대접)에 차를 따른다 △찻잔에 차를 붓고 향을 즐긴 뒤 입에 머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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