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0년간 우리나라 신문에 실린 이미지의 변천과 의미를 찾아가는 ‘백년사진’ 코너입니다. 오늘 소개할 사진은 1925년 2월 16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한 장의 사진입니다. 검은 외투를 입고 짧은 머리를 한 청년이 연단에 올라 아래를 향해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연단 아래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연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웅변대회가 열렸던 순간입니다.
전국 조선웅변대회, 1925년 2월 16일 동아일보
● 웅변대회의 소멸
동아일보 DB에서 ‘웅변’이라는 키워드로 사진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1960년대 이후 디지털화된 이미지 데이터베이스에서 단 113장만 검색되었습니다. 그중 한국인이 등장하는 사진은 극히 적었습니다.
의외입니다. 1970, 80년대 학교를 다니셨던 독자라면 반공 웅변대회, 불조심 웅변대회 등 다양한 웅변대회를 기억하실 텐데 말이죠. 그런데 남아 있는 사진의 절반 이상이 북한 사람들이 웅변하는 모습이고, 나머지는 주한 미군의 웅변대회 사진이었습니다. 정작 한국의 초·중·고교에서 열리던 웅변대회는 사진으로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는 웅변대회가 뉴스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웅변대회 자체가 점차 사라지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돌이켜보면 2000년대 이후 초·중·고생이 웅변대회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거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가끔 영어 웅변대회 홍보물을 본 기억은 있지만, 과거처럼 전국적인 대회로 주목받는 일은 드뭅니다.
엄혹한 시대에는 ‘스피커’를 응원하고 격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큰 목소리로 군중을 설득하는 것보다 각자의 분야에서 실력을 쌓는 것이 개인과 사회 전체에 더 유익하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하는 듯합니다. 정치는 분야별 전문가인 대표자들에게 맡기고 말입니다.
●아직도 큰 목소리가 필요한 시대일까
그런데 2024년 12월 이후, 우리는 너무 많은 ‘웅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쏘아 올린 계엄이라는 화살이 국회 탄핵 결의와 헌법재판소 변론 과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법조인들의 화법과 논리를 영상으로 직접 접하고 있습니다. 유튜브에는 좌우 진영을 겨냥한 중계방송과 해설방송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와 집회 현장에서는 차마 옮기기 힘든 욕설이 들립니다
높은 톤의 목소리, 주장 전달을 위한 단어 선택, 강조를 위한 반복. 초등학교 시절 접했던 웅변대회의 형식과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말 잘하는 사람의 시대입니다. 말로 세상을 쥐락펴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를 통해 큰돈을 벌었고, 어떤 이는 돈을 포기하고 뜻을 택했다고 말합니다. 과거 자신이 했던 말을 이제 와서 부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듭니다. 사람은 시대를 닮아간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양극단으로 나뉜 목소리 속에서,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는 전쟁터 같은 언어를 듣고 자란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지난 두 달 동안 쏟아진 수만 개의 영상 속에서, 저는 2025년 2월 19일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탄핵 심판 1차 변론기일에 출석한 한덕수 국무총리의 ‘웅변’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그는 톤을 높이지 않았고, 주장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하지도 않았습니다. 정치가 타협과 희생의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뒤로 빠지면서 우리 내부의 갈등이 광장과 연단으로 넘어간 2025년 대한민국에서, 누군가는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하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오늘은 100년 전 조선의 발전을 염원하며 열렸던 웅변대회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진에서 무엇을 보셨나요? 여러분의 생각을 댓글로 남겨주세요.
혹시 당시 웅변대회 기사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아래에 기사를 첨부합니다.
평양에서 개최된 전조선 웅변대회 - 2천여 명의 청중이 운집, 연사의 열변과 장내의 긴장
평양청년회 주최, 조선일보 및 본사(동아일보) 평양지국 후원으로 제1회 전조선 청년·학생 현상 웅변대회의 첫날 일정이 예정대로 13일 밤 평양 설암리 천도교당에서 개최되었다. 평양에서 처음 열린 대회였던 만큼, 시민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초저녁부터 군중이 몰려들어 약 2천여 명이 운집하며 대성황을 이루었다. 오후 7시 30분경, 평양청년회장 정두현 씨의 개회사로 웅변대회의 막이 올랐다. 첫 연사로 용강 기독청년 대표 이두록 군이 ‘나는 맹수 같은 청년이 되자’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우리 청년들은 비굴한 존재가 되지 말고, 천병만마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사자 같은 청년이 되자”는 요지의 열변을 토했다. 이어 광성고보 기독청년 대표 김대성 군이 ‘우리의 환경’이라는 주제로 연단에 올랐다. 그는 “모든 것은 환경에 지배된다. 지금 우리의 환경을 보라. 안으로 들어와서는 살 수 없고, 밖으로 나가서도 활동할 여지가 없다”고 하며, 조선의 역경과 영토 문제를 언급했다. 특히 “조상이 물려준 국토를 팔아먹지 말자”라고 강조하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다음으로 평양 불교청년회 대표 김광수 군이 ‘살길을 찾자’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사람은 먹고 살아야 한다. 배부른 세상을 원하느냐, 배고픈 세상을 원하느냐?”라고 질문하며, 국토를 팔아먹고 혹독한 북풍한설 속에서 살아가는 조선인의 현실을 꼬집었다. 또한 재해민 문제를 거론하며 “죽음의 공포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한 후, 민족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금전, 지식, 단결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금주·금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잠시 독창 공연이 있은 후, 숭대 기독청년회 장애경은 ‘우리 사회의 활로’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나는 평등주의 사회조직을 원하며,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길 바란다. 도리가 없는 사회는 멸망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의 수많은 빈민의 참상을 이야기한 후, 천도교 신도의 준동(蠢動)을 비판하고 산업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이어 광성고보 학우회 대표 곽주홍 군이 ‘역경에 분투하자’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우리에게는 건강한 몸과 정신이 있을 뿐이다. 스스로 노력해 진보와 발전을 이루자”고 주장했지만, 일부 청중들의 야유와 냉소적인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신의주 제2교회 청년회 대표 이예용 군은 ‘오직 참이 있어야 한다’라는 주제로 연설하며, “우리는 오직 진실을 추구하고 허위를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회개혁가 러셀의 말을 인용하며 기독교적 이상을 설파했다. 다음으로 평양 동명학우회 대표 이덕산 군이 연단에 올라 ‘새봄을 맞이한 우리’라는 주제로 현 사회 조직의 불합리성과 계급투쟁을 논했으나, 논리적인 요지를 잡기 어려웠고 조롱과 야유가 끊이지 않았다. 이어 평양 유정 엡웟청년회 대표 박기석 군이 ‘조선 청년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조선의 모든 현실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청년의 사명이 막중하다. 무산 계층의 비참한 현실을 보다 나은 환경으로 이끄는 것이 청년의 임무이다. 형제들이여, 미래를 낙관하자”고 주장하며 생활문화 향상에 대해 역설했다. 잠시 음악 연주가 있은 후, 성천청년회 김병욱 군이 ‘사람의 근본 문제’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사람이란 원칙적으로 평등하다. 그런데 오늘 밤 연설자들은 ‘내 민족, 내 민족’이라고만 외치고 있다. 그러면 세계 16억 인구 중 조선 민족만 잘살겠다는 말인가?”라고 반문하며,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를 주장했다. 또한 “사람의 근본 문제는 교육에 있다”라고 결론지었다. 다음으로 평양 경창문외 예수교 청년회 대표 이홍현 군이 ‘우리의 활로 실천’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국제연맹이 우리 민족을 구해줄 것인가? 아니면 코쟁이 백인들이 우리를 구해줄 것인가?”라고 묻고, 절망적 현실 속에서도 유일한 희망은 실천뿐이라며 실천주의를 역설했다. 이어 평양 연화동 청년회 대표 오희수 군이 ‘우리 사회 단결의 필요’라는 주제로 연설하며, “우리의 급선무는 경제, 교육, 사상보다도 단결이다. 우리 2천만 민족이 단결만 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인의 단결력 부족을 개탄하며 연설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보성전문 학생친목회 대표 주병서 군이 ‘조선의 현상과 청년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그는 “청년은 사회의 모든 현실을 파괴할 수도, 건설할 수도 있다. 러시아 제국도 청년들에게 주의 사상이 스며들자 붕괴되었다”고 주장하며, 프랑스 혁명을 예로 들어 조선 청년의 사명을 열변했다. 이처럼 뜨거운 열기 속에서 첫날의 웅변대회가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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