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12년, 서기 1506년 독재자의 폭정은 극에 달한다. 왕은 백성들의 집과 땅을 빼앗아 자신의 사냥터를 만들고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죽인다. 또 전국 곳곳으로 일명 ‘채홍사’를 보내 젊은 여성들을 납치하여 노리개로 삼는다. 주인공 이슬, 본명 황보연은 부모를 잃고 언니까지 납치당하자 자기 손으로 언니를 구하기 위해 무작정 길을 나선다.
민중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폭정에 저항한다. 세간에는 ‘무명화’라는 이름의 의적이 나타나 왕의 권력에 빌붙어 백성들을 탄압하는 권문세가 양반들을 하나씩 암살한다. 그리고 궁 안에서는 연산군의 큰어머니 승평부부인이 수상쩍은 정황 속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내막을 아는 사람들은 독살을 의심하지만 여기에는 추악한 비밀이 숨어 있다. 이슬은 언니를 구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반정을 도모하는 왕의 동생 대현과 만나게 된다. 줄거리는 1인칭 화자인 이슬의 관점과 대현의 관점을 번갈아 보여주며 중종반정을 향해 박진감 있게 달려간다.
정보라 소설가‘늑대 사이의 학’은 연산군 말기를 배경으로 한 역사 판타지 소설이다. 작가 허주은은 캐나다 교포이며 원작 ‘A Crane Among Wolves’는 2024년 영어로 출간됐다. 한국계 교포 작가가 한국을 배경으로 쓴 작품으로는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가 가장 유명할 것이다. 장르문학에서는 구미호 설화를 소재로 한 이윤하 작가의 ‘나인폭스 갬빗’도 잘 알려져 있다. 허주은 작가 또한 한국 역사를 상상력의 원천으로 삼는다. ‘붉은 궁’, ‘사라진 소녀들의 숲’, ‘잃어버린 이름들의 낙원’ 등 허주은 작가는 다른 대표작에서도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여성 주인공을 선보인다.
물론 청소년 여성 주인공이 혼자서 중종반정을 성공시킬 수는 없다. 주막 주인 율, 그를 돕는 ‘원식 삼촌’, 광대 영호, 과부 오덕 등 다양한 서민들의 사연이 등장한다. 율은 이슬과 마찬가지로 폭군인 왕에게 가족을 잃고 혼자 남아 주막을 운영하게 된 이야기를 밝은 목소리로 명랑하게 들려준다. 과부 오덕은 무명화가 살해한 귀족 도령 옆에서 상황을 목격한 하인의 아내다. 무명화는 목격자인 하인까지 살해하여 오덕은 남편을 잃는다. 이슬이 그 말을 듣고 오덕을 위로하려 하자 오덕은 폭력적이고 잔인했던 남편에게서 해방될 수 있어 ‘오히려 범인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등장인물의 사연은 이렇게 짧으면서도 선명하고 묵직하게 소개된다. 누구 하나 복잡하지 않은 삶이 없음을 작가는 단 한 번의 대화에서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일반적인 한국 역사소설과는 조금 다른 대사들도 등장한다. 율은 배고팠던 어린 시절에 인동초 꽃을 따서 꿀을 빨아 먹었던 이야기를 이슬에게 들려주며 말한다.
“약간의 달콤함이 영혼에 기쁨을 주기도 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이런 표현은 언뜻 이질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 16세기 초 조선에서 주막을 운영했던 서민이 어떤 일에서 ‘영혼의 기쁨’을 느꼈을지 당대를 살아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상상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신분 낮은 사람, 권세도 재물도 없는 사람, 그리고 여성의 삶이 상세하게 기록되지 않았던 시대는 역사적으로 아주 길었다. 작가는 기록에 남을 수 없었던 사람들 사이의 자매애, 우정, 사회의 주변으로 밀려난 민중이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연대의 모습을 섬세하게 상상하고 생동감 있게 그려낸다. 끝에는 달콤한 로맨스와 해피엔딩이 있다. 청소년 여성이 주인공이지만, 작품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의 내막이나 전체 분량을 생각하면 역사소설을 좋아하는 성인 독자도 흥미롭게 몰입해서 읽을 수 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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