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赤露 화보 제5회]. “모스크바 5월 1일, 적십자 거리. 오른쪽 두 번째는 클라라 체트킨(독일 공산당 여성 수령), 세번째는 片由潛, 네번째는 스위스인 모어(파리 콤뮌 조직자). 특파원 이관용 촬영”. 1925년 6월 7일자 동아일보.
이 설명은 단순한 사진 캡션이 아니었습니다. 192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메이데이 행사를 직접 취재를 했고 그리고 그 현장을 촬영한 이가 조선에서 파견된 기자라는 사실이 저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당시 우리 나라 언론이 러시아에 기자를 보낼 만한 여력이 있었을까요? 또 그 기자는 누구였을까요? 데이터베이스를 뒤져 관련 기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사를 쓴 기자는 유럽에서 철학으로 박사를 받은 후 귀국해 동아일보에 입사했던 이관용 기자였습니다. 그리고 5월 행사 취재를 위해 2달 남짓 앞선 2월 말에 모스크바로 출발했던 기록이 있었습니다.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도 4월 초순 경이었습니다. 요즘에야 하루 이틀이면 전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지만 100년 전에는 그야말로 장기간 출장을 떠나야 국제 이벤트를 취재할 수 있었던 시대였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출장 출발 당시 신문에 실린 사진입니다. 그의 나이 31살 때입니다.
1925년 2월 24일자 신문에 실린 이관용 기자 모습. 혁명 후 러시아의 모습과 그곳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의 소식을 취재하기 위해 떠난다고 신문은 설명하고 있다.
아래는 1925년 2월부터 6월까지 동아일보에 실렸던, 이관용 기자 관련 기사를 압축 정리한 내용입니다.
● ‘붉은 나라의 진실을 전하라’ — 동아일보, 1925년 모스크바 특파원 파견기
1925년 2월, 동아일보는 철학박사 이관용을 소련(당시 적로국)에 특파원으로 파견한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혁명을 거쳐 사회주의 국가로 재편된 소련은 ‘세계의 비밀 나라’로 불릴 만큼 폐쇄적인 곳이었다. 이미 동포들이 러시아로 들어가 생활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현지 동포들의 생사조차 확인하기 어려웠던 이때, 동아일보는 독자들에게 그 실상을 전하고자 결단을 내린다.
이관용은 유럽 유학을 통해 국제 정세에 밝았으며, 특히 러시아 문제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동아일보는 그를 통해 새로운 체제를 구축한 소련의 실상을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했다.
그가 도착한 모스크바에서 첫 보도한 내용은 5월 1일 메이데이(May Day) 행사였다. 수만 명의 노동자와 군인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만국의 무산자여 단결하라”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였다. 적십자 거리에서는 노동인민위원장이 열병을 지휘했고, 수십 대의 비행기가 하늘을 수놓았다. 이관용은 모스크바 한복판에서 펼쳐진 ‘붉은 도시’의 정치 선전 장면을 생생히 기록했다.
하지만 이관용의 눈은 겉으로 드러난 체제의 위용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소련 사회 곳곳의 불안정함을 목격했다. 시내에 만연해 하루에만 3차례 직접 목격한 소매치기, 시민들에 대한 과도한 검문검색, 공무소 출입에 필요한 복잡한 허가 절차, 반혁명 세력에 대한 극도의 경계심은 당시 소련의 내부 불안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여행자는 군경에게 언제든 신분을 제시해야 했고, 공산당 기관 방문에는 특별 허가증이 필요했다.
그는 또한 신경제정책 하에서 상인 계층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도 지적했다. 노동을 하지 않고 개인 영리 사업에 종사하는 자, 즉 ‘넵만(Nepman)’은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서너배 높은 생활비를 감당하고 있었다. 이들은 과도한 물가 상승에 시달렸고, 노동하지 않는 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는 심각했다. 노동복을 입지 않고 부르조아 신사복을 입고 다니면 ‘넵만’이라고 업신여겨지기 때문에 외국 사람들 특히 외교관과 기자 이외는 사치스러운 의복을 모스크바에서는 볼 수가 없다고 전했다. 구걸하는 이들에 대한 공산당원들의 냉담한 반응은, 혁명의 이상과 현실이 얼마나 괴리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관용의 보도는 일상에도 닿아 있다. 그는 러시아의 국(羹) 문화가 조선의 국밥이나 찌개와 비슷하다고 소개하며, 서유럽인이 기피하는 생선 요리 ‘쏠랸카’가 조선의 생선지짐이와 유사하다고 적었다. 식당에서는 여전히 종업원이 외투를 받아주며 팁을 기대하는 모습이 일반적이었다. 새로운 체제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구체적인 생활 풍경은 그의 관찰력의 깊이를 드러낸다.
이관용은 5월 16일 모스크바를 떠나는데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독일로 출장을 이어간다. 러시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출국 허가뿐 아니라 통과 국가인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독일의 영사관 승인과 주러 일본영사관 승인까지 총 6개국의 허가가 필요했다. 금전 소지 한도는 300엔 이하로 제한되었고, 여덟 차례에 걸친 휴대품 검사가 이어졌다.
독일에서 기자는 “모스크바에서 보지 못한 중절모, 모피코트, 유행복을 입은 여성들을 보고 부르주아 세계에 온 듯했다”며, “사람들이 마치 기계처럼 살아가고, 소부르주아적 삶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또 기자는 독일 철학을 대표하는 사상가 임마누엘 칸트의 고향을 방문, 도시 곳곳에 배어 있는 학문적 분위기를 “붉게 핀 칠엽수 아래로 정장을 한 시민들이 걷고, 교회당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나는 자연스레 칸트의 사색이 떠올랐다. 이 도시는 분명 철학이 자라날 만한 토양이다”라고 표현했다.
4개월에 걸친 소련과 독일 출장을 마친 기자의 경험담을 나누기 위해 동아일보는 1925년 6월 17일자 사고(社告)를 통해 전국 주요 도시에서 ‘적로·독일 시찰 강연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한다. 평양 사리원 신의주 개성 대구 전주 광주 부산 원산 함흥 청진 철원 인천 등이 대상이었다. 이 강연은 마침 독일에서 힌덴부르크 장군이 대통령에 당선된 시점과 맞물려, 사회주의 소련과 군국주의 독일이라는 유럽 양대 체제의 변화를 독자에게 입체적으로 소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 자주적인 시선으로 세계 변화를 보려 했던 도전
100년 전, 한국의 신문사가 소련으로 기자를 특파한 것은 단순한 외신 보도 목적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식민지 조선의 언론이 자주적인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려 했던, 전례 없는 도전이자 실천이었습니다.
철저한 감시 사회 속 불안과 모순, 혁명 후유증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던 사람들의 열정과 문화를 담아낸 이관용의 보도는 조선 언론이 세계 정세에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글로 추가 검색을 해 보니 1894년생인 이관용 기자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습니다. 1920년 스위스에서 조선인 최초로 유럽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23년 귀국한 후 기자가 되었습니다. 1929년 신간회 활동 중 체포돼어 2년 남짓 옥고를 치른 후 1932년 출옥했다가 1933년 바다에서 해수욕을 하다 횡사했습니다. 그의 굵고 짧은 인생이 아쉽습니다. 아래 사진은 AI로 강화시켜 본 이관용 기자의 모습입니다. 지금의 신문이라면 아마 현지 취재 중인 기자의 모습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을 겁니다.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은 100년 전 모스크바를 걷던 젊은 기자의 얼굴을, 그리고 그가 남긴 기록을 다시 들여다보았습니다.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좋은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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