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서 동물원으로, 다시 궁궐로… 창경궁의 장면들 [청계천 옆 사진관]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5일 13시 00분


코멘트

백년사진 No. 120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창경원에 들어온 코끼리 사진입니다. 철창 안에 서 있는 두 마리의 코끼리 부부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창경궁으로 복원되었지만 이곳은 한 때 동물원과 식물원으로 개조되어 서울의 대표적인 유락 시설이었습니다. 글의 끝부분에서 사진 몇 장도 함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상군(코끼리) 부부 입원. 1925년 7월 4일자 동아일보
일제에 의해 조선의 궁이 동물원으로 변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창경궁은 원래 세종이 아버지 태종을 위해 지은 궁이었는데 성종 대에 세 명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확장했습니다. 창경궁이 큰 변화를 맞이한 것은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면서입니다. 창경궁의 전각들이 대거 철거되고 그 자리에 박물관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들이 건립되기 시작합니다. 이름도 궁에서 원으로 바뀐 것이지요. 1910년대부터 창경원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서울의 명소였습니다. 1917년 4월 22일에는 하루에만 무려 1만 2966명이 입장을 해 당시 서울 인구 25만 여명 대비 5%가 관람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습니다. 1924년부터는 “봄 벚꽃이 만개할 때를 기다려 이, 삼 주일 동안 시기를 정하여 동물원을 밤에도 열고 수천 개의 전등을 장식하여 흥취를 돕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창경원의 ‘야앵(夜櫻·밤 벚꽃놀이)’은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실시되며 경성의 대표적인 연례행사가 되었습니다. 매년 4월 20일을 전후하여 열흘 정도 오후 10시 반까지 특별 개원했는데, 이때는 수백 개의 전등을 나무에 매달고 17m에 달하는 네온탑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우선 백년 전 사진의 주인공인, “창경원에 들어온 코끼리”의 사연을 읽어보겠습니다.

상군부처(象君夫妻 入園)
창경원 동물원에는 지난 2일 오후에 새 식구 둘이 늘었다. 이는 그 안에서 몸집도 크 중 크거니와 날마다 구름 같이 모여드는 많은 손님들의 큰 인기를 끌던 홀애비 코끼리가 작년 이 맘때에 세상을 떠난 뒤로 그 방주인이 없더니 이번에 싱가포르로부터 코끼리 부부가 일본 神戶(고베)에 와서 유죽(有竹)이라는 일본 사람 동물 장사의 중매로 바다를 건너 인천에 와서 차를 타고 와서 그 방 주인이 되었는데 그들의 나이는 일곱 살과 여섯 살이며 몸값은 아직 알 수 없으나 이 두 식구가 는 대신에 그 웃방에 있는 하마(河馬)한 부니 그 대신 동물 장사 손으로 가게 되었다하며 부부의 금슬이 끔직이 좋은 모양인데 이번에는 그 부부가 가끔 운동을 할 만한 운동장을 훌륭하게 만드는 중이라더라.

1925년 7월 4일자 동아일보

■ 코끼리 부부가 동물원에 도착한 대신 하마 한 마리가 일본 상인을 통해 일본으로 넘어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럼, 코끼리 말고 다른 동물들은 궁궐이었던 창경원에 어떻게 들어오고 나갔을까요? 서울에 있던 동물원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요? 궁금해서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 새 사자와 ‘사자원숭이’… 동물원은 시험 중
1924년 7월, 창경원 동물원에는 서인도 출신 ‘사자원숭이’(獅子猿) 한 쌍과 함께 젊은 사자 두 마리도 새로 들어왔다. 사자원숭이는 얼굴과 꼬리에 사자와 닮은 털이 나 있어 이름 붙여진 동물로, 한 쌍에 150원가량이라 전해졌지만, 아직 시험 양육 중이었다. 새 사자들은 일본 유전(有田) 동물원에서 이송된 두 살 된 개체로, 만약 적응에 성공하면 기존의 늙은 사자 두 마리에 1,500원을 더 얹어 교체할 계획이었다. 기존 사자 가족은 아버지가 죽고 어미(14세)와 딸(8세)만 남은 상황이었다.

● 창경원은 봄 소풍 1번지, 동물들도 봄앓이
1933년 4월, 창경원은 서울 시민의 봄맞이 행락지로 인기를 끌었다. 진달래, 개나리와 함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4월, 하루에 1만 명이 넘는 인파가 창경원을 찾았다. 코끼리, 호랑이, 곰, 사자 등 동물들 또한 ‘봄의 안타까움’을 참지 못해 하염없이 울타리 너머를 내다보며 몸을 비볐다. 원앙과 두루미는 물 위에서 춤을 추었고, 잔디밭에는 푸른 새싹이 솟았다. 사람과 동물이 함께 봄을 즐긴 그 풍경은 창경원의 대표적 장면이었다.

● 호랑이의 비극, 창경원 첫 사고
그러나 창경원 동물원이 항상 평화로운 곳은 아니었다. 1933년 3월 30일, 창경원 호랑이가 우리에 너무 가까이 접근한 6세 아이를 할퀴는 사건이 발생했다. 아이는 평안남도에서 상경한 가족의 아들 김태하로, 어머니와 함께 호랑이를 구경하다가 다가선 순간 변을 당했다. 어머니 역시 아이를 구하려다 부상을 입었다. 이 사고는 창경원 개원 이래 최초의 중대한 참변이었다.

● 겨울 코끼리, 서민보다 따뜻한 방에
1957년 겨울, 창경원의 코끼리는 유리문으로 둘러싸인 스팀 난방실 안에서 월동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겨울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코끼리는 따뜻한 방에서 지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표정은 어딘지 쓸쓸하고 추워 보였다고 당시 신문은 전했다. 한편, 같은 시기 북극곰은 오히려 생기를 발산하며 활발하게 우리 안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 미군 장군이 기증한 곰, 창경원으로
1955년 4월, 미극동지상군 총사령관 테일러 장군은 자신이 기르던 3살 된 수컷 곰 한 마리를 창경원에 기증했다. 간단한 기증식에는 미군과 서울시장이 참석했고, 8군 군악대와 의장병이 동원되며 의식은 장식되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창경원의 재건에 보탬이 되고자 한 기증이었다.


■창경원은 단순한 동물원이 아니었습니다. 궁궐의 과거와 일제의 통치 전략, 그리고 도시민의 일상과 욕망이 얽힌 복합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울던 코끼리, 춤추던 홍학, 관람객을 할퀸 호랑이, 겨울을 버티던 동물들의 이야기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역사와 정서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습니다.
창경원은 해방 이후에도 한참 동안 서울의 인기 유원지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 1981년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결정하고 철거와 이관 작업을 하면서 1986년 8월 23일 다시 창경궁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동아일보 DB 속에 있는 창경원의 옛날 모습 사진 몇 장을 소개하며 오늘 글을 마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창경원 대관람차/ 1983년 12월
공휴일에 밀려든 상춘객들에게 먹이를 달라고 입을 딱 벌리는 하마/ 1972년 4월 9일
창경원 동물원의 코끼리 1968년 4월 14일
오색등 휘황한 창경원 춘당지에서 보트놀이를 즐기는 상춘객들/ 1969년 4월 16일
첫돌을 맞는 창경원 사자 삼남매/ 1976년 12월 30일


창경원 밤 벚꽃놀이. 1973년 4월.

봄기운을 따라 창경원에 나들이온 관람객앞에 홍학떼가 머리들어 봄맞이 인사를 하고 있다/ 1978년 3월 2일.


■참고기사 (동아일보)
〈상군부처 入園〉/1925년 7월 4일
〈昌慶苑에 새손님〉/1924년 7월 8일
〈郊外에賞春客沙汰 昌慶苑에만萬名〉/1933년 4월 17일
〈동물원 암 호랑이가 六歲 兒를 할켜 重傷〉/1933년 4월 1일 (석간)
〈테將軍의 ‘곰’ 昌慶苑서 寄贈式〉/ 1955년 4월 19일
〈겨울철 서민층보다 나은 ‘코끼리’〉/ 1957년 12월 3일
〈일제가 창경원으로 바꾼 창경궁〉/ 2024년 9월 12일

#코끼리#창경원#동물원#서울#역사#관람객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