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밀란 쿤데라가 남긴 89개의 단어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12일 01시 40분


코멘트

◇89개의 말·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밀란 쿤데라 지음·김병욱 옮김/132쪽·1만5000원·민음사


밀란 쿤데라(1929∼2023)는 번역 문제로 몸살을 앓은 작가였다. 그의 첫 작품 ‘농담’은 프랑스어 번역가가 문체를 완전히 바꿔 소설을 다시 쓰다시피 했는데, 많은 나라에서 이 프랑스어판을 저본 삼아 중역했다. 쿤데라는 “영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번역본을 수정하느라 나는 엄청난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며 “게다가 수정 작업이 너무 늦게 끝나 피해 복구가 불가능한 경우도 많았다”고 토로했다.

이는 쿤데라의 유고 산문 2편을 묶은 이번 신간에서 소개하는 에피소드다. 11일 쿤데라 별세 2주기를 앞두고 출간됐다. 신간에는 정치적 이유로 조국 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평생 타국에 살아야 했던 작가가 체코, 체코어, 체코 문화에 대해 품은 향수가 그지없이 담겼다.

첫 번째 산문 ‘89개의 말’은 쿤데라가 소설을 집필하고 번역하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대해 사유한 ‘개인 사전’이다. ‘tre(존재)’라는 단어를 두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쓸 당시 ‘존재’라는 단어를 제목에서 빼라는 조언을 받았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이 체코 작가는 평생 자신의 책이 원래 쓰인 언어와는 다른 언어로 출간되는 것만 보았다. 1968년 러시아 침공 이후 그의 소설들이 조국에서 출간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 사전은 모든 단어를 주의 깊게 살필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이력의 반영인 셈이다.

번역에 대한 관점도 흥미롭다. 그는 “좋은 번역이라면, 그게 번역임을 알 수 있어야 한다”며 “어떤 번역을 두고 ‘물 흐르는 듯하다’ ‘마치 프랑스 작가가 쓴 것 같다’ 같은 문구로 호평하는 소리를 들으면 짜증이 난다”고 썼다. “헤밍웨이를 프랑스 작가처럼 읽는다는 건 얼마나 나쁜 일인가!”라는 대목에선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두 번째 산문 ‘프라하, 사라져 가는 시’는 단행본에는 실린 적 없는 국내 초역의 글이라고 한다. 카프카, 하셰크, 차페크 등 문학 거성을 낳은 체코의 문화적 토양을 짚고, 체코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소련 전체주의와 유럽 열강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밀란 쿤데라#번역 문제#개인 사전#체코 문화#산문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