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 경기 가평, 광주광역시 등 전국 곳곳에서 극한 호우로 이재민이 속출했습니다. 자연 재해 중에서도 사람의 힘으론 거의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수해입니다. 물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고, 그 길을 막을 수도, 방향을 틀수도 없습니다. 자연이 우리 공동체에 던지는 이 숙제 앞에서, 과연 해결책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대통령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이 수해 현장을 찾아 피해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고, 복구 작업에 힘을 보탰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 ‘숨은 영웅들’의 이야기도 조금씩 나오고 있습니다. 경기도 가평군에서는 공무원 10명이 폭우로 고립된 80대 어르신 7명을 위해 길이 끊어진 도로를 걸어 20kg의 구호품을 지게로 져서 전달했다는 뉴스도 있습니다.
100년 전에도 홍수는 사람들의 생활 터전을 쓸어갔습니다. 서울은 한반도 최악의 수해로 꼽히는 ‘을축년 대홍수’로 4만 명이 집을 잃었다고 합니다.
당시 기사 중에는 수해로 서울에 집이 부족해지자 집값이 폭등해 이재민들이 이중의 고통을 받았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이번 수해로 홍수에 집을 떠내여 보내고 혹은 무너뜨리고 하여 주택의 곤란을 당하고 있는 리재민들이 매우 다수함으로 자연히 세집의 수요가 등귀하여짐을 따라 집을 가지고 있는 가주(家主)들은 이같은 기회를 이용하여 폭리를 취하고자 집세를 나날이 올리는 중인데
이번 주 ‘백년사진’이 고른 사진은, 1925년 7월 20일자 동아일보 3면에 실린 사진 두 장입니다.
왼쪽은 서울 남대문역 역사 안에서 임시로 생활하는 수재민들의 모습이고, 오른쪽 사진은 열차 내부에서 생활하고 있는 이재민들의 모습입니다.
열차 안에서 임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보면서 문득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암담한 현실에서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을 테고 누군가에게 하소연을 하고 싶었을 텐데요. 정치 지도자들이 수해 현장을 직접 찾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요?
동아일보 DB를 찾아보니,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그러한 행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59년 9월 1일에는 ‘한강 연변 수재민을 친히 위로하는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설명이 붙은 사진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육영수 여사와 박근혜 양이 수해 지역을 방문한 기록도 있었고요.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 이후로도 대통령들의 수해 현장 방문 사진은 꾸준히 등장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재민(罹災民)‘ 사진과 피해 현황에 대한 사진을 살펴보던 중 특별한 기록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수해 현장을 보도하는 것 뿐 아니라 구호 활동에 직접 나선 신문사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1925년 7월 23일자에는 청량리에 마련된 구호 캠프 모습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신문사가 만든 구호 캠프였습니다. 커다란 천막 아래 이재민들이 줄을 서서 뭔가를 받고 있는 사진입니다. 1925년 7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본사에서 이재민 임시 수용”이라는 문장이 등장합니다. 지금의 서울 광화문, 당시 동아일보 본사 건물을 임시 거처로 내어주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후에도 구호 활동에 참여한 기록을 지면에서 종종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아일보 의료반 천막에 몰려든 수재민들. 경상북도 영주. 1961년 7월 18일1963년 7월 9일자 지면에는 “본사 기탁된 구호금품 1차분 재해대위에 전달”이라는 제목과 함께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삼남지구 풍수해 재민들을 위한 겨레의 따스한 손길을 호소해 온 본사에서는, 6월 21일부터 7월 8일까지 정오 현재까지 사회 각계에서 기탁해온 구호금품 중 제1차분을 전국재해대책위원회에 전달하였다. 의류 4,976점, 신발 218켤레, 밀가루 9포, 광목 11필, 비누 3,600개, 기타 물품과 쌀 20가마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언론의 구호 활동’은 1970년대 후반까지 꾸준히 이어졌고 수해 지역에 도착해 물품을 내리고 돌아오는 트럭 사진은 1987년까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왜 신문사가 이 일을 했을까. 지금처럼 국가 예산이 충분하지 않았던 시절, 아직 시민단체나 자원봉사 체계가 자리 잡기 전이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요.
그 시절, 언론사도 조직력과 기동력을 갖춘 몇 안 되는 주체 중 하나였습니다. 지금처럼 전국에 인쇄 공장을 두고 분산 인쇄를 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당시 신문들은 서울 본사에서 통합 인쇄하여 각 지역으로 배송됐습니다. 그래서 큰 트럭과 전담 기사들이 수송망의 핵심이었습니다. 아마도 1970년대 후반 이후, 국가가 본격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시스템을 갖추면서부터는, 신문사의 직접적인 구호 역할도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989년에는 전국의 기관이 보낸 수재 의연품 트럭들이 줄지어 있는 모습의 사진을 볼 수 있었습니다.
◇ 줄잇는 수해의연품. 1989년 8월 1일 전국에서 수해의연품을 싣고 온 차량들이 광주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통과한 뒤 잠시 멈춰 서 있다.오늘은 100년 전, 서울 남대문역 열차 안에 몸을 누인 수재민들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과 구호 트럭의 사진을 통해 우리 사회가 재난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공동체의 손길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되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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