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공업-제조업 등 백인 노동자의
잃어버린 자부심 자극하는 방식
◇도둑맞은 자부심/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이종민 옮김/484쪽·2만3000원·어크로스
“트럼프가 석탄 산업을 되살리겠다고 했을 때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어요. 하지만 그는 내 진짜 모습을 알아봐 주는 것 같았어요.”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선 후보의 유세 연설을 지켜보던 백인 남성 A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미 중부 켄터키주 파이크빌이라는 곳에 산다. 한때 이 도시는 활발한 석탄 산업 덕에 주민 다수가 벤츠를 끌고 다닐 정도로 부유한 도시였다. 하지만 광산이 문을 닫은 뒤로 현재 미국 내에서 백인 비율이 가장 높고 두 번째로 가난한 선거구다. A 씨는 이 도시에서 석탄 광부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A 씨는 작업 중 불의의 사고를 당했고, 통증을 줄이려고 약에 손을 댔다. 결국 약에 의존하는 중독자가 됐다. 직장을 잃고 결혼 생활도 파탄 났으며 아이들 양육권도 빼앗겼다. 도시도 그와 함께 저물어갔다. 다행히 A 씨는 점차 약물 의존도를 줄이며 회복 중이었는데, 그 무렵 등장한 트럼프에게서 삶의 희망을 본 듯했다.
A 씨와 같은 미 백인 노동자들은 파이크빌을 비롯해 ‘러스트 벨트’로 불리는 북동부 공업지대와 미 중부 지역에도 가득하다. 과거 광공업, 제조업 등에 종사하며 풍족한 삶을 누렸으나 산업의 쇠퇴와 함께 이들의 삶도 피폐해졌다.
오늘날 이들은 자신들의 과거 영예를 ‘알아봐 준’ 트럼프 대통령의 공화당 핵심 지지층으로 꼽힌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오히려 과거 공장, 광산 등에선 강성 노동조합의 영향력이 강해 핵심 민주당 지지층에 가까웠다. 이들의 상처 난 자부심을 포착하고, 옛 향수를 자극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돌려놓은 건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이었다. 저자는 이를 경제학적 관점을 넘어 “자부심과 수치심이라는 감정이 미국 정치를 뒤흔들었다”며 사회심리학적 관점을 더해 분석했다.
미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사회학과 명예교수인 저자는 7년간 이 작은 도시에 머물며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스스로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부터 ‘기독교 백인 남성’인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걸 평생의 소명으로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소명을 지켜내기 위해 안정적 고액 연봉 일자리도 포기할 정도다.
저자는 이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전적으로 신뢰하진 않지만, 그가 ‘좋은 불량배(good bully)’이기 때문에 받아들인다고 분석했다. 결점이 분명하지만 이들 입장에선 자신들의 몫을 가로챈 ‘새치기꾼’ 이민자, 무슬림, 여성, 성소수자 등을 대신 공격해주고 상실감을 회복시켜주기 때문이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를 수행 중이다. 이를 단순히 선거 전략의 성공으로만 바라보면 위험성이 크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이들의 고통이 정치 지도자에게 포착되면 결국 더 많은 사람이 상처받고 민주주의의 위기가 도래한다.”
책을 읽다 보면 파이크빌 이야기가 머나먼 미국의 특수한 상황으로만 다가오진 않는다. 실제로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정치적 극단주의가 빠르게 자라나고 있지 않나. 그건 파이크빌 주민들처럼 분노, 상실감, 수치심이란 감정이 우리의 세상을 휘감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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