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발 지정학적 위기로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된 가운데, 평화협정이 체결돼 호르무즈가 열리더라도 글로벌 원유 시장의 수급 공백이 수개월간 지속될 것이란 암울한 전망이 나왔다. 물류망 마비로 촉발된 고유가 상황에서도 설비 가동을 위해서 원유를 사들여야 하는 국내 정유업계의 딜레마가 극에 달하고 있다. 나아가 초고유가가 임계점을 넘어 글로벌 소비 자체가 무너지는 ‘수요 파괴’ 공포마저 산업계를 덮치는 형국이다.
21일(현지 시간) 블룸버그통신은 글로벌 주요 원유 중개업자들을 인용해 호르무즈 해협 통행이 재개되더라도 석유 시장의 구조 재편에는 수개월이 걸릴 것이라고 보도했다.
세계 최대 원자재 중개업체인 비톨(Vitol)의 러셀 하디 최고경영자(CEO)는 “호르무즈 해협 통행 재개 이후에도 공급 정상화까지 약 10억 배럴 규모의 공급 손실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10억 배럴은 전 세계 인구가 약 10일간 사용하는 막대한 물량이다.
군보르(Gunvor) 그룹의 프레데릭 라세르 리서치 총괄 역시 “원유 생산부터 전체 공급망을 완전히 재정렬해야 한다”며 “전쟁 이전 수준으로 복귀하는 데 최소 3~4개월이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각에서는 사태가 한 달 이상 지속될 경우 글로벌 석유 시장이 재고가 완전히 고갈되는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장 해협이 열려도 중동의 원유를 실어 나를 ‘선박’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도 정상화 지연의 원인으로 꼽힌다. 전쟁 기간 초대형 유조선(VLCC)들이 미국산 원유를 싣기 위해 대서양 등으로 대거 이탈했기 때문이다. 중동발 유조선 운임은 작년 대비 9배 폭등한 하루 50만 달러까지 치솟았고, 선주들마저 위험 지역 복귀를 꺼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국내 정유업체들도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호르무즈 해협 인근에 유조선을 대기시켰으나, 사태 장기화를 우려해 현재는 미국 등 비중동 지역으로 뱃머리를 돌린 상태다.
뉴스1 이에 따라 국내 정유업계의 셈법은 한층 복잡해졌다. 수급난과 선박 부족 장기화가 예상되면서, 막대한 웃돈과 운임 프리미엄을 주고서라도 당장 글로벌 물량 확보전에 뛰어들어야 할지 고민에 빠진 것이다. 해협 개방 직후 일시적으로 유가가 하락하더라도, 고갈된 비축유를 채우려는 각국의 패닉 바잉이 여름철 성수기 수요와 맞물리며 유가를 다시 폭등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게 글로벌 업계의 시각이다.
그렇다고 정유사들이 섣불리 지갑을 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현재 현물 유가가 배럴당 120~130달러까지 치솟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원유를 확보했다가 자칫 유가가 떨어질 경우 감당하기 힘든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유가가 배럴당 1달러만 하락해도 단숨에 1000억 원이 넘는 재고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원유 수급 대란을 넘어 고유가로 인한 ‘수요 파괴’ 현상이 현실화할지도 초미의 관심사다. 원유 가격 급등이 석유제품 가격 폭등으로 이어져 소비자의 구매 한계치를 넘어서면, 글로벌 소비 자체가 급격히 위축되는 수요 급감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비싼 원유 수급도 문제지만, 유가가 소비 자체를 얼어붙게 만드는 임계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점이 더 큰 공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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