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 전문가 조지 프리드먼 인터뷰
미국 ‘전략적 실용주의’로 전략 전환
공급망 무기화가 기업 전략 핵심
예측보다 대응, 민첩성이 생존 좌우
조지 프리드먼 회장은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으로 홀로코스트 생존자 가정에서 태어나 전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코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여러 대학에서 20여 년간 국가안보 전략을 강의해 왔다. 2015년 글로벌 지정학 분석 및 리서치 기관인 ‘지오폴리티컬 퓨처스’를 설립했다. ‘100년 후(The Next 100 Years)’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미국의 패권 전략 등을 통찰력 있게 진단한 세계적 전략가로 평가받고 있다. 조지 프리드먼 회장 제공
올해 2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캐나다, 멕시코, 중국을 대상으로 대규모 관세 부과를 전격 발표하며 글로벌 무역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한 이번 조치는 세계 100여 개국에 충격을 안기며 국제사회의 우려를 샀다. 이를 두고 세계적 국제 정세 분석가 조지 프리드먼 지오폴리티컬 퓨처스 회장은 “이번 조치는 돌발 사태가 아니라 미국 전략의 재정렬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한다”고 진단했다. 그는 미국은 사실 수십 년간 무역 적자 상태와 세계 경찰 역할에 대해 ‘불편함’을 품어 왔으며 2기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은 그러한 정서의 연장선에 있다는 분석을 내놨다. 프리드먼 회장은 “지금은 고정된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유동성과 리스크가 일상화된 시대”라며 “특히 한국은 지정학적 리스크와 기회가 교차하는 위치에 있다”고 강조했다. DBR(동아비즈니스리뷰) 2025년 5월 2호(417호)에 실린 프리드먼 회장과의 인터뷰를 요약 소개한다. ―다자주의의 약화가 글로벌 경영에 미치는 영향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은 경제적·군사적으로 붕괴된 상태였고, 미국은 소련의 대서양 진출을 막기 위해 마셜 플랜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통해 유럽을 재건하고 군사적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 냉전 기간 동안 미국은 세계 안보의 질서를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었다. 장기전에 돌입한 러시아는 기대 이하의 성과를 냈고, 이에 따라 미국은 러시아를 주요 위협 요소로 간주하지 않게 됐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념적 개입보다는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중심으로 외교 정책을 조정하고 있다. NATO 역시 미국의 직접 개입 없이도 자율적으로 운영 가능하다는 판단이 커지고 있다. 이는 국제 질서와 동맹 구도 전반에 근본적인 재편을 예고하는 변화다. 한국을 비롯한 주요국은 이런 변화 속에서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전략을 설계하고 대응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글로벌 환경의 변화가 무역 및 기업 경영에 미치는 가장 큰 영향은?
“미국이 주도한 무역 시스템은 ‘냉전’이라는 지정학적 구도 속에서 구축된 것이다. 미국은 동맹을 강화하고 이념적 정렬을 유도하기 위해 일정 수준의 무역 불균형이나 재정적 손실을 감수해 왔다. 하지만 이제 미국은 안보나 군사적 고려보다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중심으로 경제 관계를 설정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는 트럼프 정부가 주창하는 ‘미국 우선(America First)’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미국이 다자주의를 전면 폐기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필요에 따라 다자 플랫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한다는 점에서 ‘전략적 실용주의’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제 미국의 글로벌 경제 전략은 ‘전면적 개입’에서 ‘선별적·전략적 개입’으로 전환되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의 ‘질서 관리자’를 자처하지 않으며 자국 중심의 실익을 기준으로 지역별 지정학적 맥락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이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미중 관세 갈등의 미래는?
“미국은 1970년대 오일쇼크를 통해 특정 국가 의존의 위험성을 체험한 바 있다. 지금의 중국 의존적 공급망 구조는 정치적 긴장, 재난, 내부 불안정 등 다양한 리스크에 노출돼 있으며, 이는 전체 경제 시스템에 충격을 줄 수 있다. 따라서 단일 국가 의존은 단순한 수익성 문제가 아니라 안보와 복원력의 문제이며, 정치적 리스크를 반영한 공급망 전략이 필수가 되고 있다.” ―전략 산업에서 한국 기업이 주의해야 할 지정학적 함정은?
“반도체, 배터리, 바이오, 재생에너지는 기술 수출을 넘어 국가 안보와 자립성을 결정짓는 전략 산업이다. 미국은 중국산 핵심 부품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려 하고 있고, 이로 인해 한국은 안정적 공급처로서 주목받고 있다. 한국은 생산비 측면에선 중국보다 불리하지만, 미국 내 생산보다 저렴하고 정치적 리스크가 낮은 ‘중간 대안’으로 간주된다. 이는 지정학적 신뢰도가 무형 자산이 되는 시대가 열렸음을 뜻한다. 다만 미국의 경기 둔화나 정치 변화로 무역 장벽이 강화될 수 있는 리스크도 인식해야 하며,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전략적 프레임이 필요하다.”
―다자주의가 약화되고 보호무역주의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글로벌 기업들이 채택해야 할 전략 원칙은?
“기업이 특정 시장이나 고객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외부 충격에 취약해진다. 사업 파트너나 전략적 동반자도 정치나 외교 여건에 따라 바뀔 수 있으므로, 스스로의 생존력을 갖추는 것이 필수다. 예측 가능성에 의존한 전략은 더 이상 통하지 않으며, 이제는 민첩성과 회복탄력성이 핵심 역량이다. 기업은 조기 경보 시스템, 정치 리스크 분석 체계, 다변화된 시장 전략, 정치 데이터를 고려한 의사 결정 체계를 갖춰야 한다. 정치와 산업이 교차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조건은 예측이 아니라 빠른 대응이다.”
―한국 기업과 경영진에 당부하고 싶은 메시지는?
“미국은 원래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닌, ‘북미 요새’ 전략을 선호해 왔다. 냉전과 2차대전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글로벌 개입에 나섰던 것이며 현재는 선택적 개입 기조로 회귀 중이다. 미중 갈등도 전면 대결보다는 실용적 협상으로 전환되고 있는 상황을 기민하게 주시해야 한다. 한국은 태평양 전략의 핵심축인 만큼 지정학적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이에 한국 기업들은 단일 전략에 집착하기보다 여러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이원적 전략 체계를 갖춰야 글로벌 불확실성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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