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지게 가난한 이민자 아들, 초등학교 중퇴의 구두닦이, 프레스 기기에 왼쪽 새끼손가락을 잃은 공장 노동자, 전국 금속노조 위원장, 그리고 브라질 최초의 3선 대통령까지. 79세의 브라질 현직 대통령 룰라의 삶은 드라마가 따로 없죠. 2010년 말 그가 두 번째 임기를 마쳤을 때 지지율은 무려 83%. 당시 브라질 경제는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며 곧 초강대국으로 도약할 기세였습니다.
그런 룰라 대통령이 요즘 수세에 몰렸습니다. 6월 27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그의 국정 수행에 대한 긍정 평가는 고작 23.9%. 역대 최저로 떨어졌고요. 6월 25일, 브라질 의회는 룰라 대통령의 세금 인상안을 부결시켜 굴욕을 안겼습니다. 의회가 행정명령을 뒤집은 건 33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6월 18일 브라질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15%로 올려 시장을 놀라게 했는데요. 무려 7차례 연속 인상이자, 2006년 이래 가장 높은 금리입니다.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를 원했던 룰라 행정부엔 악재가 아닐 수 없죠. 이제 브라질은 실질금리(물가상승률을 반영한 금리) 기준으론 튀르키예에 이어 세계 2번째로 금리가 높은 나라가 됐습니다. 덕분에 요즘 국내 자산가들 사이에선 브라질 국채 투자가 다시 인기라고도 하죠(연 14%대 이자율+통화가치 상승 시 수익 기대).
브라질은 2026년 10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습니다. 4선 도전을 앞둔 룰라 대통령과 여당(노동자당)은 상당히 초조합니다. 가상 대결에서 룰라 대통령은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2019~2022년 재임)에 37.4%대 50%로 크게 밀리고 있거든요.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이미 지난해 선거법원 판결로 2030년까지 출마가 금지됐는데도 말이죠. 최근 지지율 조사를 보면 룰라의 오랜 지지층이었던 가톨릭계와 서민층조차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모두가 ‘룰라의 몰락’을 얘기하기 시작했죠.
그럼, 브라질 경제가 그렇게나 엉망인 걸까요. 그건 아닙니다. 2024년 브라질 GDP 성장률은 3.4%로 팬데믹 직후를 제외하면 2011년 이후 가장 높았고요. 최근까지도 15분기 연속 경제성장을 이어가고 있죠. 5월 실업률은 6.2%. 역대 최저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브라질 국민은 ‘경제가 나쁘다’(60.3%)고 비판합니다. 동시에 ‘이게 다 룰라의 잘못된 정책 탓’이라고 손가락질하고요. 도대체 뭐가 진짜 문제일까요.
재정 지출 확대의 부메랑
지난 10년 동안 브라질 경제는 재정 적자의 늪에 빠졌습니다. 경제 성장세는 꺾였는데, 좌파(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 2011~2016년 재임)든 우파(보우소나루 전 대통령)든 집권만 하면 각각 퍼주기식 정책을 펼친 탓이었죠(정권마다 퍼준 대상은 좀 다름). 룰라 대통령이 재집권한 2023년, 경제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재정적자 탈출이었는데요.
하지만 분배에 방점을 둔 룰라 대통령은 재정건전성 문제는 뒷전으로 미뤄뒀죠. 대신 이런 정책을 펼칩니다.
①최저임금 대폭 인상 2024년 6.97%, 2025년 7.5%. 브라질 최저임금 인상률은 물가상승률을 크게 웃돌게 책정됐습니다. 근로자들의 실질소득이 늘어나야 한다는 룰라 대통령의 신념을 반영한 거죠. 그는 일종의 ‘소득주도 성장’을 주창했는데요. “(최저임금 인상으로) 통화량이 증가하면, 소매판매가 늘고 산업생산량이 증가해서, 경제가 활성화되고 새로운 일자리가 창출된다”는 논리였습니다.
룰라 대통령은 2024년 말 뇌출혈로 응급수술을 받았다. 이후 한동안 그는 공식 석상에 모자를 쓰고 등장했다. AP 뉴시스취지야 좋습니다. 문제는 브라질에선 최저임금을 올리면 그걸 따라서 올라가는 항목이 한둘이 아니란 점이죠. 최저임금 인상률만큼 국가가 노인과 장애인에 주는 수당은 자동으로 늘어나고요. 은퇴자 연금 수급액도 최저임금에 직접적으로 연동됩니다. 소득세 면제 기준 역시 최저임금을 따라 해마다 높아지게 되죠. 모두 재정 적자를 더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②연방 공무원 임금 대폭 인상 브라질은 공무원 처우가 상당히 좋은 나라입니다. 연방 공무원, 특히 세무·사법·외교 공무원은 대졸 신입직원 월급이 2만 헤알(약 500만원)을 훌쩍 넘죠. 브라질 평균 임금 수준(3500헤알, 약 88만원)을 생각하면 상당한 고소득인 건데요. 그래서 이전 보우소나루 정부는 “(공무원들이 많은) 브라질리아는 베르사유 궁전 같다”면서 공무원 특권 해체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브라질 수도 브라질리아의 전경. 게티이미지하지만 룰라가 집권하면서 공무원 급여와 복지수준은 다시 대폭 향상됩니다. 2023년엔 9% 임금을 올려줬고요. 2024년엔 복리후생의 대대적 조정으로 각종 수당이 크게 오릅니다(식량 수당 118%↑, 미취학 아동 지원금 51%↑, 의료 지원금 평균 50%↑). 얼마 전엔 2025년과 2026년 각각 9% 임금 인상을 발표했고요. 그만큼 재정 부담은 늘어만 갑니다.
소고기 대신 간헐적 단식이 왔다
경제가 가파르게 성장하는 시기라면 이런 식의 분배 정책이 성장을 더 가속할지 모릅니다. 실제 룰라 대통령의 1기, 2기 임기(2003~2010년) 땐 그랬죠. 그 시절 브라질은 중국의 눈부신 제조업 성장에 연료(원자재)를 대면서 큰 호황을 누렸고요. 국영 석유회사 페트로브라스는 잇달아 거대 유전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룰라 대통령은 복지 확대와 재정건전성 두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죠.
하지만 그의 운이 이제 다한 걸까요. 그 사이 원자재 가격은 폭락했고, 믿을 구석이던 중국 경제는 예전 같지 않게 됐습니다. 환경은 뒤바뀌었는데 룰라 대통령 경제정책은 15년 전과 그대로이니. 통할 리가 없습니다.
브라질 최대 도시 상파울루 모습. AP 뉴시스연이은 공공지출 확대 정책과 재정적자의 늪에서 벗어날 의지가 보이지 않는 정부. ‘역시 룰라 정부는 못 믿겠다’며 불안해진 해외투자자들이 지난해 말 썰물처럼 빠져나갔습니다. 지난해 12월 브라질 환율은 역대 최고(1달러=6.2679헤알)를 찍었죠(통화가치는 최저).
가뜩이나 재정으로 시중에 풀린 돈이 많은데, 환율까지 치솟으니 물가는 뛰었고요. 물가 중에서도 특히 소비자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식품 물가가 주로 오르면서(2024년 8% 상승) 국민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룰라는 피카냐(브라질에서 인기 있는 소의 엉덩위 윗부분 고기)를 약속했지만 간헐적 단식을 제공했다’는 조롱 섞인 밈이 유행했죠.
브라질 중앙은행은 물가와 환율을 모두 잡기 위해 급격한 기준금리 인상에 나섰는데요(2024년 10월 10.5%→현재 15%). 그 결과 정부의 재정 부담은 한층 커졌습니다. 가뜩이나 세입보다 세출이 많은데, 국채 투자자들에게 지불할 이자율까지 치솟았으니까요.
디지털에서 패배했다
물가가 뛰고 대출이자율이 높아지는 걸 반길 국민이 없는 건 당연합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늘 가장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룰라 대통령 지지율이 반토막 난 데는 또 다른 원인이 있습니다. 바로 소통의 실패이죠.
올해 초 룰라 정부는 가짜뉴스로 큰 홍역을 치렀습니다. 브라질 국민은 ‘PIX’라고 부르는 중앙은행이 만든 수수료 무료의 실시간 결제 시스템을 애용하는데요. 지난 1월, 브라질 국세청이 PIX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는 정책을 발표합니다. 탈세 방지를 위해 거액의 현금거래를 들여다보겠다는 거였죠. 딱히 특별할 게 없는 정책이었는데요.
그런데 28세의 우파 정치인 니콜라스 페레이라가 인스타그램에 이를 주제로 한 숏폼 영상을 올리면서 갑자기 상황이 심각해집니다. 그는 영상에서 이렇게 주장했죠. “이 조치의 진짜 목적이 뭘까요? 세금을 더 많이 거두고 주머니에서 돈을 빼내는 겁니다!” 정부가 PIX 거래에 세금을 부과할 거라는 일종의 가짜뉴스였습니다. 이 영상은 3억회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급속히 퍼져갔죠. 여론이 들불처럼 일어납니다.
브라질 전직 대통령인 보우소나루.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보우소나루는 쿠데타 모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모든 혐의에서 유죄를 받으면 12년형을 살게 된다. AP 뉴시스정부가 성난 민심을 진정시키려 해명에 나섰지만 아무 소용 없었습니다. 결국 국세청은 계획을 전면 철회하며 항복해야만 했죠. 파울루 펠트만 상파울루대 교수는 “그것(PIX 사태)이 룰라의 이미지를 실제로 손상시킨 첫 번째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디지털 시대에 맞는 소셜미디어를 이용한 정책 홍보. 79세의 나이 든 대통령이 이끄는 좌파 정부는 이걸 할 줄 몰라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합니다. 야당은 교묘한 가짜뉴스로 여론을 자극해서 번번이 정부 정책의 발목을 잡죠. 아날로그 정부는 디지털 포퓰리즘에 어떻게 맞설지 몰라 허둥대기만 하고요.
결국 디지털 소통에 실패한 룰라 대통령이 선택한 대응책은 소셜미디어 규제. 가짜뉴스를 포함한 불법 콘텐츠에 대해 플랫폼이 책임지게 만들겠다는 건데요. ‘사실상 검열’이란 반발이 일면서, 이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커집니다.
브라질 헤알화 가치는 달러 대비 올해 16% 상승했다. 같은 기간 원화 가치 상승률(8.5%)의 두배 수준이다. 구글 금융브라질 보베스파 지수는 올해 들어 15.75%나 올랐습니다. 지난해 바닥을 쳤던 헤알화 통화가치(달러화 기준)는 16% 넘게 뛰었고요. 한동안 떠났던 해외 투자자들이 올해 초부터 다시 브라질로 돌아옵니다.
투자자들이 다시 룰라 정부를 믿어보기로 한 걸까요? 그건 아니고요. 최근 투자자를 환호하게 하는 건 룰라의 지지율 급락입니다. 2026년 대선에서 그가 당선될 가능성이 사라지고 있단 의미니까요.
모건스탠리는 5월 보고서에서 브라질 시장을 낙관적으로 평가했는데요. “앞으로의 선거 일정이 필요한 정책변화의 기회를 열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혔죠. 오를 대로 오른 기준금리가 앞으로 떨어질 일만 남았다는 전망 역시 투자자들이 브라질 증시를 낙관적으로 보는 이유입니다.
현재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출마가 금지된 데다, 쿠데타 모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상황이고요. 누가 야당 대선후보로 나설진 아직 알 수 없습니다(현재로선 타르치시오 드 프레이타스 상파울루 주지사가 가장 많이 거론됨). 그런데도 시장에선 임기가 18개월이나 남은 ‘남미 좌파의 대부’ 룰라의 퇴장을 기정사실로 보고 있죠.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인의 마지막이라기엔 좀 초라한데요. 역시 시대를 초월한다는 건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By.딥다이브
미국 언론은 룰라에게서 바이든 전 대통령을 보더군요. 마땅한 차기 주자를 키우지 않은 채 나이 든 리더에 의존한 좌파 정당이 몰락을 자초한다는 해석인데요. 주요 내용을 요약해 드리자면.
-룰라 브라질 대통령 지지율이 역대 최저로 떨어졌습니다. 국민들은 경제난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브라질의 거시 경제 지표는 비교적 탄탄하지만, 소비자들이 민감한 식품 가격이 뛰었고, 기준금리가 15%까지 올랐습니다.
-재정 적자 감축이 시급한 브라질이지만, 룰라 대통령은 취임 뒤 공공지출 확대 정책을 지속해 왔습니다. 이에 투자자들이 불안해하면서 지난해 말 헤알화 가치는 폭락했죠.
-가짜뉴스 확산은 룰라 정부의 발목을 잡습니다. 디지털 여론전에서 좌파 정부는 번번이 패배합니다. 실제보다 국민들이 경제가 더 좋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이죠. 벌써부터 투자자들은 룰라의 4선 당선은 어렵다는 데 베팅하기 시작했습니다. 브라질 증시와 통화가치는 살아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