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예금 뺏어갈라? 러시아인이 ‘은행 대신 유리병’ 찾는 이유[딥다이브]

  • 동아일보

9일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군사 퍼레이드. ‘강한 러시아’란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이 국가적 행사가 올해는 유독 소박했습니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탱크, 미사일 같은 무기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았거든요. 정부는 보안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 ‘과시할 무기가 없다’, ‘우크라이나 드론 공격이 무서워서다’라는 수군거림이 나왔죠.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인 지 어느덧 5년째. 러시아 국민은 지쳐가고, 한동안 반짝했던 경제마저 급격히 가라앉고 있어요. 이젠 ‘우리가 승리하고 있다’는 크렘린의 선전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분위기인데요. 푸틴 대통령의 운이 다해가는 걸까요. 흔들리는 러시아 경제를 들여다보겠습니다.

5월 9일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 퍼레이드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신화통신 뉴시스
5월 9일 모스크바 붉은광장에서 열린 전승절 기념 퍼레이드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연설하고 있다. 신화통신 뉴시스

*이 기사는 5월 15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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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지도와 삐삐의 부활
인구 1300만명의 대도시에서 예고 없이 수시로 모바일 인터넷이 끊기면 어떻게 될까요. 내비게이션이 먹통이 되면서 운전자들이 길을 잃고, 신용카드 결제와 모바일 뱅킹이 막히고, 음식 배달기사와 온라인 쇼핑몰 사업자들은 주문이 끊기고, 은행엔 현금을 찾으려는 예금자들이 몰려들죠.

이게 폭격 맞은 이란 테헤란 얘기가 아니고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서 지난 3월부터 벌어지고 있는 일입니다. 특히 9일 전승절을 앞두고는 일반 휴대전화 통신까지 끊겨서 구급차조차 부를 수 없게 되어버렸었죠.

시민들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현지언론 보도에 따르면, 종이지도와 무선호출기(삐삐), 유선전화 판매가 급증하는 기현상이 나타났고요. 온라인 거래에 의존하는 소상공인이나 배달 기사는 생계마저 위협받을 위기에 처했죠.

5월 6일 모스크바의 마네즈나야 광장을 거니는 시민들 모습. AP 뉴시스
5월 6일 모스크바의 마네즈나야 광장을 거니는 시민들 모습. AP 뉴시스
러시아 정부는 ‘인터넷 블랙아웃’이 방어를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고 주장합니다. 우크라이나 드론이 러시아 내부 기지국 신호를 이용해 공격해서 어쩔 수 없이 차단했단 거죠. 또 비슷한 이유로 러시아인이 가장 많이 쓰는 메신저 서비스 ‘텔레그램’ 접근까지 제한했어요(러시아 1억4500만 인구 중 약 9000만명이 이용). 우크라이나 정보기관이 텔레그램을 통해 러시아 민간인을 포섭할 수 있다면서요.

하지만 정말 그게 이유일까요? 인터넷 차단해도 우크라이나 드론은 날아오던데?(스타링크 이용) 텔레그램을 버리고 러시아 정부가 만든 ‘맥스’ 메신저를 사용하라고? 이거 개인 메신저까지 검열하겠단 뜻 아닌가요?

정보를 통제해서 비판적인 여론이 확산하는 걸 막으려는 러시아 정부의 빤한 의도를 눈치채지 못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시민들의 불만이 들끓고 있죠. 특히 정치나 전쟁에 무관심했던 이들까지 비판에 가세하기 시작했는데요.

이런 민심의 변화를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 유명 인플루언서 빅토리아 보냐입니다. 지난달 그가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푸틴 대통령께 드리는 호소’라며 18분짜리 영상을 올렸죠. “보안기관은 끊임없이 이것저것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직한 러시아인들을 착취하고 이 나라에서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1979년생의 방송인 빅토리아 보냐는 모나코에 거주 중인 러시아 유명 패션 인플루언서다. 그의 ‘푸틴 대통령께 드리는 호소’ 영상은 용감하다는 찬사를 받으며 현재까지 310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빅토리아 보냐 SNS
1979년생의 방송인 빅토리아 보냐는 모나코에 거주 중인 러시아 유명 패션 인플루언서다. 그의 ‘푸틴 대통령께 드리는 호소’ 영상은 용감하다는 찬사를 받으며 현재까지 310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빅토리아 보냐 SNS
파티 참석이나 요트 타는 영상을 주로 올리던, 정치색이 전혀 없는 패션 인플루언서가 이토록 용감하게 사회비판 발언을 하다니. 이 영상은 3100만 조회수를 기록하며 단숨에 큰 화제가 됐고요. 결국 크렘린 대변인이 “영상이 다룬 주제에 대해 조사가 진행 중”이라고 언급해야 했죠.

BBC 보도에 따르면 최근 러시아 대통령 행정실 건물 앞에는 수십 명이 긴 줄을 늘어선 이례적인 모습이 포착됐어요. ‘인터넷 검열과 차단을 중단해달라’고 촉구하는 청원서를 푸틴 대통령에게 전달하려는 사람들이었죠. 사실 러시아에선 이렇게 공개적으로 정부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건 특이하고 위험한 일이거든요. 그만큼 민심의 동요가 심상찮다는 뜻입니다.

국영 여론조사 기관이 발표한 푸틴 대통령의 최근 지지율은 65.6%. 3월 73.3%에서 7주 연속 하락한 건데요. 20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한 이후 최저라고 하죠.

2차 대전보다 길어진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난 지 4년이 지났지만, 러시아 국민 상당수는 한동안 전쟁에 무관심한 편이었습니다. 정부가 동원령을 내린 게 아니라 지원병 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이죠. 높은 입대 보너스(약 4300만원 수준)에 이끌린 가난한 시골 청년들만 주로 전쟁터로 나갔고요. 또 전쟁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실업률이 뚝 떨어지고 임금이 뛰는 바람에, 오히려 노동자 입장에선 먹고 살기가 괜찮았어요. 무기 공장이 24시간 쉼없이 돌아가면서 러시아 경제성장을 이끌었고요.

하지만 2025년부터 슬슬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왜? 일단 전쟁이 길어도 너무 길어졌고요. 무엇보다 러시아 정부가 돈이 바닥났기 때문이죠.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벌인 전쟁(러시아에선 ‘대조국전쟁’이라 칭함)보다도 길어졌어요. 지금 러시아 청년들은 증조할아버지 세대보다 더 긴 전쟁을 겪고 있는 셈이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러시아군 사상자는 약 100만명. 점점 전쟁으로 다치거나 죽은 친척과 지인을 둔 사람들이 늘어만 갑니다.

4월 16일 우크라이나 드론의 반복적인 공격을 받은 러시아 크라스노다르주 남부 투아프세의 정유소와 선적 터미널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AP 뉴시스
4월 16일 우크라이나 드론의 반복적인 공격을 받은 러시아 크라스노다르주 남부 투아프세의 정유소와 선적 터미널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AP 뉴시스
게다가 전쟁이 이제 국경지대만이 아니라 내륙까지 번졌어요. 그동안 우크라이나 장거리 드론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정유시설과 항만까지 타격하기 때문이죠. 집 근처에서 울리는 폭발음이 전쟁을 실감케 합니다.
오랜 전쟁과 서방의 제재로 러시아 정부 곳간은 빠르게 비어가고 있어요. 한해 예산의 40%를 전쟁에 쏟아붓고 있기 때문이죠. 러시아 연방 재무부가 집계한 올 1~4월 누적 재정적자는 약 800억 달러. 2026년 한 해 적자 목표치의 절반을 이미 훌쩍 넘어버렸습니다. 이란전쟁으로 유가가 뛰고 러시아산 원유 수출이 늘었다곤 하지만, 이 막대한 적자를 메우긴 역부족이죠.

돈이 없으면 돈 나올 구멍을 어떻게든 만들어야겠죠. 그래서 러시아 정부는 지난해부터 세금과 공공요금을 무섭게 올리고 있습니다. 2025년엔 법인세율을 대폭 높이더니(20→25%), 올해는 부가가치세를 인상했죠(20→22%). 수입 차와 가전제품엔 ‘재활용 부담금’을 붙이고, 대기업엔 ‘횡재세(초과이윤세)’를 물리고, 해외 송금에 대한 ‘환전세’를 대폭 올렸고요. 한마디로 전쟁을 위해 온갖 세금을 올려서 국민들을 쥐어짜는 중입니다.

민생과 직결된 공공서비스 역시 요금인상 폭탄이 터지고 있어요. 가스, 전기, 수도요금이 전국적으로 평균 12%씩 뛰었죠. 정부가 발표하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5%대이지만, 아무도 그걸 신뢰하지 않습니다. 중앙은행 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국민이 현재 체감하는 물가상승률은 약 14%에 달하죠.

곳곳에서 아우성이 터져나옵니다. 중소기업 면세 혜택이 사라지면서, 세금 때문에 가게 문을 닫는 동네 미용실, 식당, 카페가 늘어가고요. 적자 기업이 늘면서 러시아 회사채 시장 물량 중 25%가 디폴트(채무불이행) 위험에 처했다는 분석이 나오죠. 의료 예산이 부족한 탓에 일부 항암제 공급이 끊기면서 암환자들의 불만이 폭주하고요.

2월 20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 여성이 문을 닫은 식료품점 앞을 지나가고 있다. AP 뉴시스
2월 20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한 여성이 문을 닫은 식료품점 앞을 지나가고 있다. AP 뉴시스
이 와중에 최근엔 이런 루머까지 돌기 시작했어요. ‘정부가 예산 적자를 메우기 위해 루블화 예금을 강제로 몰수하거나 동결할 거래.’

물론 정부는 헛소문이라고 일축했지만, 불안감은 커집니다. 안 그래도 요즘 모바일 뱅킹이 자꾸 끊기는데, 이게 혹시 예금 동결과 관련 있나 싶은 거죠. 그래서 아예 은행에서 예금을 왕창 인출해서 현금을 집에 보관하는 사람들이 급증했어요. 연 13%에 달하는 예금이자를 포기하면서까지 말이죠. 1991년의 소련도 아니고 21세기 러시아에서 이게 뭔 일인가 싶은데요. 요즘 러시아에선 ‘반크(러시아어로 은행) 대신 반카(유리병)’이란 씁쓸한 언어유희가 유행이라고 합니다.

군사 주도 성장의 한계
올해 1분기 러시아 GDP 성장률은 -0.3%. 2023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고요. 12일 러시아 경제개발부가 수정한 올해 경제성장률은 0.4%. 지난해 9월 전망치(1.3%)를 대폭 낮췄습니다. 알렉산드로 노박 부총리는 인터뷰에서 “고성장 이후 조정이 뒤따르는 건 정상”이라면서도 “지출 우선순위 설정”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강조했죠. 한마디로 정부가 돈이 부족하니까 아껴 써야 한단 뜻입니다.

이게 바로 군사지출로 만든 성장의 한계입니다. 정부가 빚을 내서 무기를 생산하면 당장은 GDP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죠. 하지만 전쟁으로는 경제의 선순환을 만들어낼 수가 없어요. 탱크나 미사일은 전장에서 파괴되고 사라질 뿐, 새로운 부를 창출해내지 못하니까요. 오히려 전쟁으로 모든 자원(인력과 자본)을 빼앗기면서 민간 부문은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성장의 기반 자체가 무너지는 거죠.

전쟁이 5년째 이어지면서, 이제 인터넷 차단과 물가 상승, 세금 인상 같은 문제가 모두 푸틴 대통령과 관련 있다는 걸 일반 시민들도 인식하게 됐다. AP 뉴시스
전쟁이 5년째 이어지면서, 이제 인터넷 차단과 물가 상승, 세금 인상 같은 문제가 모두 푸틴 대통령과 관련 있다는 걸 일반 시민들도 인식하게 됐다. AP 뉴시스
러시아는 오는 9월 총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현재 집권여당인 통합러시아당 지지율은 30% 아래로 추락했어요. 여당 지지율과 푸틴 대통령 지지율은 별개이지만, 그래도 민심 이반을 드러내주는 수치이죠.

그럼 혹시 이번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하면 푸틴 대통령의 권력 기반도 흔들리는 거냐고요? 에이, 그럴 리가요. 일단 러시아 정부는 선거를 조작해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고요. 어차피 의회 내 야당은 사실상 크렘린에 맞서지 않는 ‘관제 야당’에 불과하거든요. 선거 하나로 푸틴 시대가 저무는 그런 일은 러시아에선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선거인데, 푸틴 정권으로선 신경 쓰일 수밖에 없긴 하죠? 바로 그게 요즘 인터넷 검열이 부쩍 강화된 이유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특히 구 소련의 비밀경찰 KGB를 계승한 정보기관 연방보안국(FSB)이 이런 ‘디지털 철의 장막’ 구축의 중심에 있다고 하죠.

하지만 터져 나오는 민심을 언제까지 억지로 틀어막을 수 있을까요. 역사를 보면 1917년 러시아 혁명은 황제에게 바치는 민중의 청원 행렬을 군대가 총칼로 제압한 ‘피의 일요일’ 사건(1905년)이 단초가 됐습니다. 민심을 억누르면 오히려 더 큰 폭발로 이어진다는 것, 그걸 가장 잘 기억하는 나라는 다름 아닌 러시아입니다. By.딥다이브

*이 기사는 5월 15일(금요일) 발행한 딥다이브 뉴스레터의 온라인 기사 버전입니다. ‘읽다 보면 빠져드는 경제뉴스’ 딥다이브를 뉴스레터로 구독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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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전승절#우크라이나 전쟁#인터넷 검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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