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 덮는 어정쩡한 길이 ‘카프리 팬츠’의 화려한 부활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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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NOW]
1948년 독일 디자이너가 개발… 오드리 헵번이 입어 세계적 유행
올 시즌 패션 하우스에서 주목… 슬림한 상의에 플랫 슈즈 매치

하루에도 수없이 바뀌는 게 유행이라지만 이번엔 좀 의외다. 무릎을 덮는 어정쩡한 길이로 종아리를 더없이 짧아 보이게 만들던 카프리 팬츠가 트렌드로 돌아올 줄이야. ‘비율파괴템’으로 불렸던 이 팬츠에 패션계가 다시 열광하고 나섰다.

카프리 팬츠는 1948년 독일 디자이너 소냐 드 레나르트가 개발한 팬츠다. 이탈리아 카프리섬을 여행하던 중 해변을 걷기에 다소 거추장스러웠던 팬츠를 과감히 잘라낸 것이 시작이었다. 무릎을 덮는 부담스럽지 않은 기장과 잘록한 허리선, 옆트임 디테일로 곡선미를 가득 살린 이 바지는 등장과 동시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이 바지를 섬의 이름을 따 ‘카프리 팬츠’라 명명했다. 1950∼60년대 카프리섬을 찾은 미국과 유럽의 상류층 휴양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카프리 팬츠의 인기가 세계적으로 높아진 데는 할리우드의 영향이 컸다. 배우 오드리 헵번은 1954년 영화 ‘사브리나’에서 그녀에게 꼭 맞게 재단된 지방시의 블랙 카프리 팬츠에 플랫 슈즈를 신고 등장해 세계적 유행을 불러일으켰다. 우아하면서도 경쾌한 그의 스타일은 그해의 시그니처 룩이 됐다. 오드리 헵번을 비롯해 매릴린 먼로, 브리지트 바르도 등 당대 스타들이 앞다퉈 카프리 팬츠를 착용하면서 세련된 아이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1961년 미국 시트콤 ‘더 딕 반 다이크 쇼’에서 메리 타일러 무어가 독립적인 여성 캐릭터를 연기하며 선보인 카프리 팬츠 역시 큰 화제를 모았다. 여성의 바지 차림이 드물었던 당대 분위기에 카프리 팬츠는 성의 해방과 자기표현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카프리 팬츠는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한동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낭만과 자유를 부르짖던 1970∼80년대의 히피풍 벨보텀 팬츠와 복고 열풍과 함께 1990년대 길거리를 장악한 와이드 팬츠에 밀려 카프리 팬츠는 점차 촌스러운 옛 아이템으로 인식됐다. 특유의 여성성을 강조한 실루엣은 젠더 감수성이 확장되는 흐름 속에서 시대착오적으로 비쳐졌고, 패션사의 전면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후 제니퍼 애니스턴, 세라 제시카 파커 등 Y2K(2000년대 초반)를 대표하는 패션 아이콘들이 카프리 팬츠 유행을 이끌고자 했지만 ‘다리가 짧아 보인다’는 인식 탓에 호불호가 갈렸다. 이후 등장한 스키니 진과 레깅스의 전성기에 밀려 이렇다 할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대중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유행은 돌고 도는 법. 올 시즌 현대적인 실루엣과 다양한 소재, 감각적인 스타일링으로 무장한 카프리 팬츠가 컴백을 예고하고 있다. 내로라하는 패션 하우스들이 저마다 1950∼60년대 고전의 상징인 카프리 팬츠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나선 것이다.

와이드 팬츠와 스키니 진 등에 밀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카프리 팬츠가 올 시즌 현대적인 실루엣과 다양한 소재로 돌아왔다. 유명 패션 하우스들은 이번 봄여름 컬렉션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다양한 카프리 팬츠를 선보였다. 블라우스와 카프리 팬츠를 매치한 셋업 룩으로 우아함의 정수를 보여준 타미 힐피거(왼쪽 사진), 클래식한 재킷과의 조합으로 세련된 오피스 룩을 선보인 캐롤리나 헤레라(가운데 사진), 도시적인 그레이 셋업을 보여준 샌디 리앙(오른쪽 사진). 각 브랜드 제공
와이드 팬츠와 스키니 진 등에 밀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카프리 팬츠가 올 시즌 현대적인 실루엣과 다양한 소재로 돌아왔다. 유명 패션 하우스들은 이번 봄여름 컬렉션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다양한 카프리 팬츠를 선보였다. 블라우스와 카프리 팬츠를 매치한 셋업 룩으로 우아함의 정수를 보여준 타미 힐피거(왼쪽 사진), 클래식한 재킷과의 조합으로 세련된 오피스 룩을 선보인 캐롤리나 헤레라(가운데 사진), 도시적인 그레이 셋업을 보여준 샌디 리앙(오른쪽 사진). 각 브랜드 제공
타미 힐피거는 2025 봄여름(SS) 컬렉션에서 블라우스와 카프리 팬츠를 매치한 셋업 룩으로 우아함의 정수를 드러냈다. 7부(7푼) 길이 특유의 경쾌함을 살린 모던한 스타일이 주를 이루며 이전보다 한층 고급스러운 인상을 남겼다는 평이다. 캐롤리나 헤레라는 ‘카프리 팬츠의 귀환’이라 불릴 만큼 다채로운 룩을 쏟아낸 이번 쇼에서 클래식한 재킷과의 조합으로 당장이라도 출근길에 시도해도 좋을 세련된 오피스 룩을 제안했다. 허리를 웃도는 하이웨이스트 디자인 덕에 다리가 길어 보이는 효과가 더해졌다. 루이비통 컬렉션도 화제를 모았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니콜라 제스키에르는 신소재와 패턴을 입힌 카프리 팬츠로 브랜드 특유의 아이덴티티를 강조했다. 가벼운 경량 소재에 스트라이프 패턴을 입힌 독특한 카프리 팬츠에 구조적인 상의를 더해 개성을 부여했다. 알렉산더왕은 유니폼에서 힌트를 얻은 베이스볼 핀 스트라이프 카프리 팬츠로 스포티즘을 극대화했다.

신진 디자이너들의 활약도 인상적이다. 샌디 리앙은 도시적인 그레이 셋업으로 ‘카프리 팬츠=올드 패션’이라는고정관념을 단번에 깨트렸고, 필리카 K는 카프리 팬츠를 메인으로 한 간결하고 정제된 북유럽 스타일로 주목받았다.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보여준 토템은 무릎 아래로 떨어지는 여유로운 핏으로 편안함과 세련미를 동시에 잡아냈다. 알렉산드라 로에게 호브는 니트 소재를 적용한 여유로운 카프리 팬츠 스타일로 포멀부터 캐주얼까지 아우를 수 있는 스타일을 제안했다.

카프리 팬츠를 실패 없이 입기 위한 팁은 바로 비율과 균형에 있다. 전문가들은 “슬림한 상의에 타이트한 팬츠를 매치한 뒤, 재킷이나 카디건처럼 볼륨감 있는 아우터를 더해 실루엣의 대비를 주라”고 조언한다. 슈즈 선택도 중요하다. 발등이 드러나는 플랫 슈즈나 미니멀한 스트랩 샌들, 슬링백 키튼 힐 등으로 발목 라인을 드러내면 다리 라인이 자연스럽게 정돈된다.

한때 올드 패션으로 치부됐던 카프리 팬츠를 올여름 정말 입어도 될까? 만약 스타일에 신선한 변화를 주고 싶다면 옷장 속 깊숙이 묻혀 있던 카프리 팬츠로 시작해 보자. 카프리 팬츠의 창시자 소냐 드 레나르트가 그러했듯, 때로는 과감한 한 번의 선택이 트렌드의 역사를 만들어 내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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