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NOW]
파리-밀라노 패션하우스 잇달아 선봬… 여성의 자신감-당당함 표현 아이템
포멀과 캐주얼 자유롭게 넘나들어… 모노톤 베스트 다양한 하의와 매치
조끼를 여미는 순간, 어깨가 자연스럽게 펴지고 마음속 깊이 자신감이 차오른다. 클래식한 슈트 속에 숨겨진 베스트 한 벌이 주는 힘은 예상보다 크다. 정갈하게 여민 슈트 베스트는 단순한 의복을 넘어, 입는 이의 몸과 마음을 단단히 지지하는 보이지 않는 갑옷과도 같다.
패션계에서 슈트 베스트는 오랫동안 남성성을 상징하는 요소였다. 기원은 14세기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푸르푸앵(Pourpoing)’이라고 불리는 짧은 상의를 즐겨 입었는데 이것이 현대 베스트의 원형이 됐다. 17세기에는 이너웨어로 입을 수 있도록 소매가 없는 스타일이 등장했고, 그 위에 긴 상의와 ‘저킨(Jerkin)’이라고 불리는 코트형 겉옷을 걸치기도 했다. 오늘날의 슈트처럼 말이다. 프랑스에서 탄생한 이 베스트는 1660년대 영국으로 번지며 지금과 유사한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당시 왕이었던 찰스 2세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프랑스 패션에 반기를 들고 좀 더 간결한 디자인의 ‘웨이스트 코트(Waist Coat)’를 도입했다. 후에 다시 프랑스로 역수출하며 유행을 주도했다. 이후 1840년대 재킷의 등장과 함께 베스트는 스리피스 슈트의 필수 요소로 자리 잡게 된다.
남성의 지위와 품격을 상징하던 슈트를 여성이 입기 시작한 건 20세기에 들어서다. 1930년대를 대표하는 영화 배우 마를렌 디트리히는 여성의 슈트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셔츠와 베스트에 블랙 턱시도와 나비 넥타이, 포마드로 정갈히 넘긴 머리까지 그가 선보인 클래식한 슈트 룩은 패션 역사에서 성 역할과 여성성에 대한 통념을 정면으로 뒤흔드는 도발적이고 상징적인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1966년 이브 생 로랑의 전설적인 ‘르 스모킹(Le Smoking)’ 턱시도 슈트에 영향을 주며 후대에 이르러 젠더리스 패션의 초석이 됐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어깨 패드가 강조된 슈트와 함께 베스트 역시 여성들의 파워 드레싱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사회에서 남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여성들은 슈트와 베스트를 통해 자신감과 권위를 표현했고 이는 자연스럽게 여성복에 스며들었다.
이번 봄여름 컬렉션에서 패션하우스들은 다양한 슈트 베스트를 선보이고 있다.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베스트 룩을 선보인 티비(왼쪽 사진), 시크한 가죽 베스트와 팬츠 셋업으로 여성의 강인함을 표현한 샤넬(가운데 사진), 허리 라인을 강조한 슬림 핏 베스트에 태슬 장식 스커트와 팬츠를 한 벌로 연출한 야 이(오른쪽 사진). 사진 제공 각 브랜드
이번 봄여름 컬렉션에선 그 어느 때보다 클래식한 슈트 베스트 룩이 줄을 잇고 있다. 파리와 밀라노의 유려한 패션하우스부터 도쿄, 상하이의 신진 브랜드까지 앞다퉈 고전적 품위와 현대적 감각을 겸비한 슈트 베스트 스타일을 선보이며 파워를 증명하고 나섰다. 일례로 여성의 자유로운 비상을 주제로 한 ‘샤넬’은 시크한 가죽 베스트와 팬츠 셋업들로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은 여성들의 강인함을 시사했다. ‘알렉산더 맥퀸’은 로맨틱한 셔링 장식이 돋보이는 글렌 체크 웨이스트 코트를 스커트와 셋업으로 연출해 클래식 슈트에 신선한 숨결을 불어넣었다.
런던과 뉴욕 컬렉션도 마찬가지다. ‘피터 도’ ‘티비’ 등 다양한 패션하우스에서는 전통적인 슈트의 격식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 베스트 룩을 선보이며 베스트를 슈트의 일부가 아닌 독립된 패션 아이템으로 격상시켰다. 아시아 무대에서도 슈트 베스트의 약진은 두드러졌다. 상하이 기반의 ‘야 이’와 도쿄를 대표하는 ‘비비아노’의 쇼가 대표적. 실루엣에 변주를 더한 베스트 스타일링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야 이는 허리 라인을 강조한 슬림 핏 베스트에 매끄럽게 떨어지는 태슬 장식 스커트와 팬츠를 한 벌로 연출해 드라마틱한 실루엣을 만들어 냈다. 런웨이 밖에서도 베스트의 다재다능한 매력은 이어진다. 켄들 제너, 카이아 거버 같은 해외 패션 아이콘은 물론이고 신세경, 기은세, 크리스탈 등 국내 셀럽들도 각자의 개성을 녹인 베스트 룩을 선보이며 트렌드를 현실로 끌어내고 있다.
슈트 베스트의 가장 큰 매력은 포멀과 캐주얼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데 있다. 깔끔한 테일러링의 베스트는 셔츠를 입지 않아도 충분히 갖춰 입은 느낌을 줄 수 있다. 특히 모노톤 베스트는 다양한 스타일의 하의와 쉽게 어우러진다. 블랙 베스트에 정장 팬츠를 셋업으로 맞춰 입으면 카리스마 넘치는 매니시 룩이 완성되고, 헐렁한 화이트 데님 팬츠를 매치하면 편안하면서도 시크한 캐주얼 룩을 연출할 수 있다.
잘 고른 베스트 하나면 열 아이템 안 부럽다는 말이 괜한 소리가 아니다. 무엇보다 슈트 베스트의 진짜 매력은 입는 순간 느껴지는 특유의 애티튜드에 있다. 이브 생 로랑의 르 스모킹 슈트가 그랬듯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의 스타일은 늘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오늘날의 슈트 베스트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한때 남성 권위의 상징이었던 베스트는 이제 여성의 당당함을 대변하는 스타일로 재정의되고 있다. 클래식과 트렌디함, 우아함과 카리스마를 모두 아우르는 슈트 베스트 열풍은 여성들의 파워 워킹과 함께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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