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트럼프 대통령(왼쪽)과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 리야드=AP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첫 해외 순방지를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로 선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성난 시위대를 마주하지 않을 국가를 골랐다”는 냉소적인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순방 첫날인 13일(현지 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중동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훈수 두지 않겠다”고 연설하자 미국과 중동이 술렁이고 있다. 그의 연설 내용과 파장을 살펴봤다.
● “훈수 두지 않겠다”
13일 리야드에서 열린 미-사우디 투자포럼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빈 살만 왕세자를 ‘오랫동안 알아온 유일무이한 친구’라며 감사 인사를 전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12분간 관세 도입, 투자 유치, 이민 단속 등 자신의 성과를 자찬한 뒤 사우디의 눈부신 경제 성장에 대해 언급했다.
13일 리야드에서 열린 미-사우디 투자포럼애서 연설하는 트럼프 대통령. 리야드=신화 뉴시스“우리 눈앞에서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이 과거의 지친 분열이라는 오래된 갈등을 초월하고 있다. 중동이 혼란이 아니라 상업으로 정의되고, 테러가 아니라 기술을 수출하며, 서로 다른 국가·종교·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말살하는 폭격이 아니라 함께 도시를 건설하는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다.
세계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이 위대한 변혁은 서방의 개입이나, 당신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일을 다뤄야 하는지 훈수 두는 사람들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니다. 리야드와 아부다비의 빛나는 기적들은 (미국 보수 진영의) 이른바 ‘국가 건설자’들과 네오콘, 혹은 수조 달러를 쓰고도 하발, 바그다드, 그 외 수많은 도시들을 개발하는 데 실패한 진보 비영리단체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13일 리야드에서 열린 미-사우디 투자포럼애서 연설하는 트럼프 대통령. 리야드=신화 뉴시스대신 현대 중동의 탄생은 이 지역 사람들 자신에 의해 이루어졌다. 바로 여기에 있는 여러분,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 말이다. 주권 국가를 개발하고, 고유한 비전을 추구하며, 자기 방식대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온 사람들이다. 여러분이 해낸 일은 정말 놀랍다.
결국 이른바 국가 건설자들은 세운 나라보다 훨씬 더 많은 나라들을 파괴했고, 간섭주의자들은 자신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복잡한 사회에 간섭했다. 그들은 여러분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했지만, 정작 자기들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평화, 번영, 진보는 궁극적으로 여러분의 유산을 급진적으로 거부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러분이 사랑하는 그 유산과 전통을 포용함으로써 이뤄졌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분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여러분은 아라비아 방식으로 현대의 기적을 이뤄냈고, 그것은 좋은 방식이다.
13일 리야드에서 열린 미-사우디 투자포럼애서 연설하는 트럼프 대통령. 리야드=신화 뉴시스오늘날 걸프 국가들은 삶의 질이 향상되고, 경제가 번창하며, 개인의 자유가 확대되고, 세계 무대에서의 책임이 증가하는 안전하고 질서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
수십 년간의 갈등 끝에, 이제 마침내 과거 세대들이 꿈만 꿀 수 있었던 미래에 다가설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 중동에서 평화, 안전, 조화, 기회, 혁신, 성취의 땅이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에 이날 행사에 모인 아랍 국가 주요 인사들은 기립 박수를 보냈다. 이 연설은 2001년 조지 W 부시 대통령 행정부에서 아프가니스탄(2011년)과 이라크(2003년)를 침공하며 굳어진 미국의 중동 정책의 방향성을 완전히 뒤집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연설 영상이 중동 여러 국가에서 소셜미디어 상에 빠르게 퍼지며 화제가 됐다”며 “곳곳에서 트럼프의 연설을 보며 환호했다”고 전했다.
21일 카타르 수도 도하에서 열린 카타르경제포럼 무대에 오른 트럼프 주니어(오른쪽). 도하=이지윤 기자 asap@donga.com * 부친의 방문 일주일 만에 장남 트럼프 주니어가 카타르를 찾아 “미국에 투자하라”는 연설을 했다. 중동국가들이 트럼프 일가를 환영하는 배경을 살펴봤다. https://www.donga.com/news/Inter/article/all/20250522/131658002/2
● 트럼프가 실패의 유산을 털어낼까
연설을 두고 미국에서도 의외로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고 있다. 스티븐 쿡 미국외교협회(CFR) 중동아프리카부 선임연구위원은 “트럼프의 리야드 연설은 그가 자신의 외교 기조를 솔직하게 말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며 “노골적인 사익 추구나 특이한 성격과는 별개로, 트럼프는 미국이 지고있던 ‘실패의 유산’을 털어내고 있다”고 포린어페어 기고에서 짚었다.
쿡은 “트럼프가 보수 진영의 개입주의자와 진보 진영의 자제론자 양측을 불편하게 만들 비전을 제시했다”고 했다. 미국이 중동 현지의 문제에 적극 개입하면 정권을 가리지 않고 대게 실패했다는 점을 부각했다는 것이다.
중동 최대 미군 기지인 카타르 알 알우데이드 공군 기지에서 15일 연설하는 트럼프 대통령. 도하=AP 뉴시스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 공식을 벗어나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중동에서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쿡은 “트럼프는 미국 파트너들에게 확실하게 안보를 제공하고, 미국을 외국인 직접투자의 목적지로 홍보하겠다는 2대 목표를 갖고 중동 순방에 나섰다”고 분석했다. 특히 “걸프 국가들이 미국 내 경제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겠다는 약속을 실제로 이행한다면, 이와 관련해 (적절하지 않은 외교 노선이라고) 반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쿡은 “트럼프의 순방에는 조잡해 보이고 거칠게 들리는 부분들도 있었지만, 그의 접근 방식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유는 그것이 워싱턴 사람들이 바라는 방식이 아니라, 실제 세계의 작동 방식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 결과 이전 대통령들보다 더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다만 중국의 중동 내 입지를 단숨에 흔들기에는 부족할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인프라, 인공지능(AI), 에너지 등 경제 분야에서 중동과 협력을 공고히 해왔다. 예컨대 사우디와 중국의 지난해 무역 규모는 1150억 달러(약 157조 원)로 미국(570억 달러)의 2배를 넘어섰다. 외교에서도 사우디는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인 2022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국빈으로 초청해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했다. 이듬해에는 중국의 중재로 베이징에서 이란과 국교 정상화에 합의했다.
● 트럼프 지지층도 반길 新중동 기조
중동과의 관계를 민주주의 확산이나 군사 개입 대신 투자와 계약을 중심으로 재정의하겠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전략이 국내 지지층의 정서와 괴리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된다.
워싱턴 싱크탱크 ‘책임 있는 국정 운영을 위한 퀸시 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대선에서 투표한 유권자의 12%가 군 복무 경험자였으며, 이들 중 65%가 트럼프 대통령을 선택했다.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을 뽑은 비율은 34%에 그쳤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거친 세대는 “우리가 나라를 재건하려한 건지, 아니면 그냥 죽으러 간 건지 모르겠다”는 회의감과 워싱턴 외교·안보 엘리트에 대한 분노가 크다. 싱크탱크 디펜스프라이오리티의 댄 콜드웰 고문은 “참전용사는 거의 모든 사람이 친구나 가족을 잃었고, 지난 23년간의 대외적 모험주의와 그 정책의 실패를 책임져야 할사람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분노했다”고 퀸시 연구소에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는 끝없는 전쟁을 끝내겠다” “그들은 너희를 전쟁터에 보냈고, 나는 집으로 데려오겠다” “그들은 전 세계를 챙겼고, 나는 미국부터 챙기겠다”는 식의 메시지로 이 감정을 정확히 짚었다. 개입 대신 자국 이익을 강조한 메시지는 중동에 대한 미국인의 극심한 피로감을 달래고, 경제 성과에 대한 요구와도 맞물린다. 실책을 바이든 행정부는 물론 전통 공화당 매파를 향해서도 돌리며 트럼프 지지층 특유의 반(反)엘리트 정서까지 겨냥했다.
25화 요약: 트럼프 대통령은 두 번째 임기 첫 해외 순방지로 사우디, UAE, 카타르를 택해 군사 개입 대신 투자와 거래 중심의 중동 전략을 선언했다. “훈수 두지 않겠다”는 리야드 연설은 미국의 전통적 개입주의 노선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이 기조는 전쟁 피로감에 지친 참전용사 유권자들의 정서와 맞물리며 지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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