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둘째 아들 에릭이 지난달 29일(현지 시간) 홍콩에서 열린 ‘비트코인 아시아 2025’ 행사장에서 트럼프 일가의 암호화폐 회사인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을 소개하며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고 있다. 홍콩=AP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세 아들 트럼프 주니어, 에릭, 배런이 세운 ‘월드리버티파이낸셜(WLF)’이 발행한 코인이 1일(현지 시간) 바이낸스 등 주요 암호화폐 거래소에 상장됐다. 상장 첫날 트럼프 일가가 보유한 WLFI 코인 가치는 오후 5시경 50억 달러(약 6조9600억 원) 선에 달했다.
3대째 부동산 가업을 이어온 이들이 가상 자산 사업에 뛰어들자 이해충돌 논란이 크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익 추구를 위해 친(親) 가상자산 정책을 펼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일가가 보유한 WLFI 코인의 가치가 부동산 자산의 가치를 뛰어넘었다고 분석했다.
가상 자산 사업을 두고 트럼프 가문의 사업 전략이 그대로 반영됐다는 분석도 있다. 이들은 정부 정책을 지렛대 삼아 그 시대에 가장 큰 돈을 벌 수 있는 사업 분야를 선택해왔다. 또 아버지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해 자녀의 사업을 돕는 모습도 대를 이어 전해지고 있다.
● 1930~60년대: 프레드의 공공주택 건설
트럼프 대통령의 아버지 프레드 트럼프는 10대 시절부터 작은 건축업 사업체를 운영했다. 그의 사업은 1930년대 뉴딜 정책의 출범과 함께 전환을 맞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행정부는 1934년 연방주택공사(FHA)를 설립했다. 전후 경기 활성화를 위해 대규모 공공주택 건설을 장려했다. FHA는 공공주택에 주택 담보 대출을 지원해주는 사업을 펼쳤고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프레드는 FHA 자금을 끌어와 뉴욕에 공공주택 단지를 지었다.
프레드는 직접 지은 퀸스와 브루클린 일대의 아파트로 임대 사업을 벌였다. 연방정부는 1차 세계대전 등에서 싸웠던 참전용사를 위한 공공주택 건설을 지원해줬고, 프레드는 이 지원금을 활용했다. 브렌트 세불 펜실베이니아대 교수와 마이클 글래스 보스턴칼리지 교수가 올 6월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300만 달러 이상이 프레드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비용을 부풀려 실제 필요한 비용보다 더 큰 규모의 주택 담보 대출을 유치한 뒤, 차액을 챙기는 방식으로 자신의 부를 축적한 것이다.
높게 책정된 아파트값 때문에 각종 문제가 생겼다. 세입자는 보다 높은 임대료를 부담했고, 연방정부 예산이 낭비됐다는 지적도 컸다. 하지만 당시 미국법상 위법 행위는 없었다. 프레드의 꼼수는 부동산 업계 관행으로 여겨졌다.
그는 결국 브루클린 최대 아파트 개발업자로 올라섰다. 자녀도 사업에 활용했다. 1950, 60년대 자녀 명의로 신탁회사를 만들어 아파트가 세워진 땅의 소유권을 이전했다. 뉴욕타임스(NYT)는 이를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한 꼼수로 해석했다. 이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8세에 백만장자가 됐다. 1968년 대학 졸업 직후에는 아버지 소유 회사를 통해 연간 100만 달러의 소득을 올리게 됐다.
프레드는 지역 정치인들과의 인연도 사업에 활용했다. 1974~1977년 재임한 브루클린 출신 뉴욕시장 에이브 빔은 프레드가 20년 넘게 정치자금을 대준 인물이었다. 프레드는 브루클린 민주당의 주요 후원자였고, 빔의 ‘절친’ 버니 린덴바움은 트럼프 가족의 변호사였다.
트럼프 대통령 역시 2016년 NYT 인터뷰에서 아버지의 부동산 사업의 성공 비결로 정계 인맥을 꼽았다. 그는 “부동산 개발의 핵심은 용도변경이다. 용도변경을 위해서는 정치인들과 아는 사이여야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이들과 교류했다”고 했다.
● 1970년대: 트럼프 대통령의 맨해튼 진출
펜실베이니아대 재학 시절 필라델피아와 뉴욕을 오가며 아버지에게 경영 수업을 받던 트럼프 대통령은 1968년 펜실베이니아대를 졸업했다. 1970년대 뉴욕은 부동산 사업을 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시 재정이 파산 위기에 놓이며 도시가 흔들리고 있었다. 범죄율이 치솟자 중산층이 안전한 곳을 찾아 뉴욕을 떠나며 세수가 급감하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정부 지원금을 활용해 공공주택을 개발하는 시대는 사실상 끝이 난 것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부자는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아냈다. 1974~1977년 빔 시장 재임 기간에 그와의 밀접한 관계를 활용해 상업 부동산으로 눈을 돌렸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버지에게 빌린 100만 달러를 밑천 삼아 맨해튼 진출에 성공했다”며 자신의 성공 신화를 설명하곤 했지만, 실제로는 더 큰 규모의 지원을 받고 아버지의 정계 인맥을 통해 각종 특혜를 받아냈다.
브루클린에서 맨해튼으로 진출하기 위한 작업은 1974년 빔 시장의 취임과 동시에 시작됐다. 그해 트럼프 부자는 맨해튼의 마지막 미개발 노른자위 땅이라고 평가받던 기차역 ‘펜 스테이션’ 일대 부지 3곳을 낙찰 받았다.
뉴욕 지역매체 빌리지보이스에 따르면 부지를 소유한 펜센트럴교통회사(PCTC)는 입찰 희망자 중 트럼프 부자와만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은 빔 시장이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PCTC 측은 “부지의 정치적 민감성을 고려해 트럼프 부자가 적임자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몇 년 뒤 트럼프 대통령은 부지 2곳을 시정부에 넘기며 83만 달러를 받았고, 낡은 코모도르 호텔이 있던 부지에는 하얏트 호텔을 짓기 시작했다.
빔 시장은 1977년 퇴임을 약 열흘 남기고는 트럼프 대통령의 하얏트 호텔 개발 사업에 대해 40년짜리 감세 혜택을 줬다. NYT는 트럼프 대통령이 뉴욕시 역사상 전례 없는 감세 혜택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하얏트 호텔 관련 감세액이 2016년 기준 36년간 총 3억4930만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감세 작업을 주도한 빔 시장의 측근 스탠리 프리드먼은 빔 시장의 임기가 끝나자 트럼프 대통령의 변호사 로이 콘의 로펌으로 이직하며 연을 이어갔다. 하얏트 호텔은 1980년 완공됐고, 트럼프 대통령은 1983년 트럼프 타워까지 연이어 공개하며 맨해튼의 성공적인 30대 부동산 개발업자로 변신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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