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숨진 성범죄자 엡스타인으로 위기 맞은 트럼프
엡스타인, 집권 전 트럼프와 교분… 교도소서 극단 선택 후 음모론 횡행
“기득권 세력들 성범죄에 연루”… 지난 대선 때 지지층 결집 활용
WSJ-머스크 등 보수 진영서도… “문건에 트럼프 나와” 의혹 제기
‘음모론 신봉’ MAGA, 불만 고조… “중간선거 타격” vs “그래도 트럼프”
엡스타인과 친했던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동생 앤드루 왕자(왼쪽)가 2001년 영국 런던의 파티에서 당시 18세 미국 여성 버지니아 주프레의 허리를 안고 사진을 찍었다. 주프레는 엡스타인과 엡스타인의 전 연인 길레인 맥스웰(오른쪽)의 회유와 강요로 17세 때부터 앤드루 왕자를 포함한 각국 유명인에게 성을 상납했다고 폭로했다. 런던=AP 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성년자 성매매 의혹 등으로 수감됐다 감옥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월가 유명 투자자 제프리 엡스타인(1953∼2019) 때문에 재집권 후 중대 위기를 맞았다. 집권 1기 때부터 “엡스타인의 타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관련 문서를 모두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트럼프 대통령이 정작 백악관 복귀 뒤 정보 공개에 미온적 태도를 보이자 그의 핵심 지지층 ‘마가’(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란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 겸 강경 보수 유권자층을 뜻함)가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반(反)트럼프 진영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도덕성에 타격을 줄 수 있을 사건으로 예의주시하고 있다.
특히 이번 사태는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층과 보수 언론이 야당 민주당, 트럼프 대통령의 반대파, 진보 언론 못지않게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언론 재벌 루퍼트 머독이 소유한 보수 성향 매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트럼프 대통령이 엡스타인과 가까운 사이였고, 유명 인사들의 이름이 대거 올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성접대 고객 명단인 이른바 ‘엡스타인 리스트’에 대통령이 포함됐을지 모른다는 의혹에 관한 보도를 잇달아 내보내고 있다.
마가 진영은 줄곧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 대외 불간섭 정책 등을 강하게 옹호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이에 반하는 이란 본토에 대한 직접 공습을 단행했을 때도 예상보다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이런 마가 진영이 왜 6년 전 사망한 성범죄자와 관련된 대통령의 행보에 대해선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지, 이번 사태가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 정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분석해 봤다.
● 트럼프와 엡스타인의 오랜 인연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부동산 사업가였던 1980년대 후반부터 엡스타인과 교류했다. 두 사람은 뉴욕 맨해튼, 플로리다주 팜비치 등에 호화 저택을 갖고 있고,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업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WP는 두 사람이 뉴욕 라과디아 공항에서 팜비치까지 비행기를 같이 타고 다녔고, 트럼프 대통령의 팜비치 사저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파티를 즐겼다고 전했다. 또 엡스타인의 맨해튼 저택에서도 두 사람이 식사를 같이 하는 사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2002년 뉴욕매거진 인터뷰에서 엡스타인을 “멋진 남자(terrific guy)이고 함께 있으면 정말 재미있다”고 했다. 다만 “엡스타인은 나만큼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하고 특히 ‘젊은 여자’를 좋아한다”고 덧붙였다.
2004년 말 두 사람은 경매로 나온 팜비치의 호화 주택 ‘라메종드라미티에’(프랑스어로 ‘우정의 집’)을 서로 사들이기 위해 경쟁하면서 멀어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 저택을 4135만 달러(약 570억 원)에 매입했다. 이후 두 사람이 교류했다는 공개 기록은 거의 없다고 뉴욕타임스(NYT)가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훗날 지인들에게 당시 엡스타인과 결별한 이유가 단지 부동산 때문만은 아니라고 털어놨다. 엡스타인이 마러라고 리조트 회원의 딸에게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바람에 그의 리조트 출입을 금지해야 한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5년 팜비치 경찰은 엡스타인이 14세 소녀에게 마사지를 받고 돈을 지급했다는 혐의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엡스타인은 2006년 30여 명의 미성년자에 대한 의제강간, 성 매매 혐의 등으로 체포됐다.
기소된 엡스타인은 거물 법조인으로 구성된 호화 변호인단을 고용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의 불륜, 클린턴 전 대통령의 위증 사건을 조사한 전 연방 특별검사 케네스 스타 등도 변호인단에 포함돼 있었다.
제프리 엡스타인하지만 엡스타인은 2008년 유죄 평결을 받았다. 일각에서는 최고 종신형까지 예상했지만 일부 혐의를 인정하는 ‘사전형량조정제도(plea bargain)’를 통해 18개월의 형량을 선고받았다. ‘모범수’라는 명목으로 복역 시작 3개월 만에 낮에는 감옥 밖에서 생활하다가 밤에 감옥에 복귀하는 특혜도 누렸다. 출소 또한 3개월이 앞당겨져 그가 ‘무늬만 복역’을 한 건 고작 15개월이었다.
다만 피해 여성 중 한 명인 버지니아 주프레(1983년∼2025년 4월)가 2015년 여러 피해자 중 최초로 얼굴을 드러내고 엡스타인의 알려지지 않은 성범죄를 폭로했다. 그는 자신이 한때 마러라고 리조트에서 일했던 10대 시절부터 엡스타인의 회유로 찰스 3세 영국 국왕의 동생 앤드루 왕자 같은 각국 유력 인사에게 성상납을 했다고 공개했다. 트럼프 대통령 또한 주프레가 마러라고 직원이었으며 엡스타인이 자신으로부터 ‘뺏어갔다’고 했다.
엡스타인은 2019년 7월 뉴욕 경찰과 연방수사국(FBI)에 또 체포됐다. 2002∼2005년 또 다른 20여 명의 미성년자에게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한 달 후 엡스타인은 수감 중이던 뉴욕 맨해튼 남부 메트로폴리탄 교정센터에서 침대 시트로 목을 맸다.
2020년 7월에는 엡스타인의 옛 연인으로 그의 여러 성범죄에서 조력자 노릇을 한 혐의를 받고 있는 길레인 맥스웰이 체포됐다. 맥스웰은 2022년 6월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엡스타인의 사망 직후부터 음모론을 제기했다. 그는 당시 트위터(현 X)에 “엡스타인이 클린턴 전 대통령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어 숨졌다”는 다른 이용자의 검증되지 않은 주장을 공유했다. 또 2020년 8월 정치매체 액시오스 인터뷰에서 엡스타인의 사망 당시 교도소 내 감시 카메라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타살인지 자살인지 불분명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미국 대선 과정에서는 엡스타인의 죽음에 관한 음모론을 민주당을 공격하고 지지층을 결집하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실체가 불분명한 기득권 세력 ‘딥스테이트(deep state)’가 엡스타인의 사망 배후에 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엡스타인의 성범죄에 연루됐기에 사망에 관한 명확한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주장을 폈다. 자신이 재집권하면 관련 정보를 모두 공개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이는 그의 핵심 지지층이 마가 중에서도 특히 음모론을 즐기는 성향의 ‘큐어논(QAnon)’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큐어논은 미국 엘리트 집단이 소아성애자, 미성년 성매매업자, 사탄 숭배자 등으로 구성됐다는 음모론을 추종하고 있다. 이들은 2020년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에서 패하자 ‘대선은 사기였다’는 주장을 펴며 2021년 1월 6일 워싱턴 의회에 난입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큐어논은 트럼프 대통령을 딥스테이트에 맞서 자신들을 구원하려고 온 ‘영웅’ 겸 ‘구원자’로 본다.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진행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기소와 수사는 모두 ‘트럼프가 딥스테이트를 해체하려고 시도했기에 일어난 핍박과 박해’라고 생각한다. ‘엡스타인은 자살하지 않았다(Epstein didn’t kill himself)’ 같은 해시태그(#)를 적극 공유하고 이에 관한 물품도 판매하고 있다.
큐어논은 2017년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 ‘포챈’(4chan)에 ‘큐(Q)’라는 이름의 사용자가 각종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등장했다. 예일대 로스쿨을 나온 클린턴 전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부부,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하버드대 등을 중퇴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등의 기득권 세력이 딥스테이트의 일원으로 미국을 좌지우지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 재집권 뒤에는 엡스타인 관련 자료 공개 거부
백악관으로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은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로버트 케네디 전 법무장관, 마틴 루서 킹 목사 등의 암살에 관한 정보를 공개하면서도 엡스타인 관련 문서는 공개하지 않았다.
이로 인한 마가 진영의 불만이 커지는 상황에서 한때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지만 대통령의 감세 정책 등을 두고 결별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등이 올 6월 5일 폭탄 발언을 내놓으면서 대통령과의 관련 의혹이 눈덩이처럼 증폭됐다.
당시 머스크는 “엡스타인 문건에 트럼프 이름이 있다. 이것이 그가 문건을 공개하지 않는 진짜 이유”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그가 트럼프 대통령의 탄핵까지 거론했기에 상당한 후폭풍을 몰고 왔다.
며칠 후 머스크는 “내가 지나쳤다”며 관련 글을 삭제했다. 그러나 올 7월 7일 법무부가 “엡스타인에 관한 추가 자료 공개는 없을 것”이라고 발표하자 이후 다시 “엡스타인 자료를 공개하라”는 글을 연달아 X에 올리며 대통령 측을 압박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트럼프 대통령과 엡스타인의 연관성을 적극 보도하는 매체가 WSJ라는 점도 눈길을 끈다. WSJ는 지난달 17일 트럼프 대통령이 두 사람이 아직 돈독한 관계였던 2003년 엡스타인의 50세 생일 때 여성 나체 그림을 배경으로 한 축하 편지를 그에게 보냈다고 보도했다. 6일 후에는 팸 본디 법무장관이 올 5월 대통령에게 “엡스타인 문건에 당신의 이름이 여러 번 나온다”는 점을 보고했다는 추가 보도도 냈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격노했다. 그는 WSJ를 ‘3류 신문’ ‘쓰레기 더미’ 등으로 비판하며 두 보도 모두 “명백한 허위”라고 주장했다. 또 WSJ와 소유주 머독 등에게 100억 달러(약 13조8000억 원)의 명예훼손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제기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WSJ의 행보를 두고 머독의 우선 순위가 ‘현직 대통령과의 친분’이 아니라 ‘미국 보수 여론의 충성심’을 유지하는 데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머독은 WSJ 외에 또 다른 보수 매체 폭스뉴스의 대주주다. 자신을 ‘보수 진영의 수호자’로 여기는 머독이 마가 진영의 요구와 정반대로 행동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미국의 보수 진영은 자유무역을 옹호하고 활발한 대외 정책 개입을 주장했기에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정책 등에 불만이 쌓였다는 해석도 나온다.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WSJ는 전통적인 경제적 보수 가치를 추구하는데 미 경제에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저임금 이민자들을 막고 교역을 축소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순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WSJ가 ‘엡스타인으로 현직 대통령 또한 압박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은 “보수 진영 내 파워 게임의 단면을 보여준다”고 논평했다.
● 내년 중간선거 영향 전망은 엇갈려
이번 사태가 내년 미국 중간선거에 미칠 영향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린다.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중간평가 성격을 띠는 이 선거에서는 435명 하원의원 전원, 100명인 상원의원의 3분의 1을 뽑는다.
큰 영향이 없을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은 마가 진영 일부에서 대통령에 대한 반대 움직임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들이 더 싫어하는 세력은 민주당이란 점에 주목한다. 결과적으로 선거에선 공화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 백창재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금까지 나온 의혹으론 엡스타인과 대통령의 불법적인 거래가 정확히 밝혀진 것이 없다. 마가가 민주당에 투표할 만큼 대통령에 대한 신뢰가 추락하지는 않았다”고 진단했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마가는 트럼프 대통령 외에는 민주당을 견제할 대안이 없다고 본다. 내년 선거에서도 공화당에 표를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각에선 WSJ가 트럼프 대통령을 압박하면서 오히려 마가 진영이 뭉치는 계기가 됐다는 해석도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백악관 수석전략가를 지낸 스티브 배넌은 “WSJ와 머독이야말로 ‘딥스테이트’이자 마가의 진정한 적”이라고 역공을 폈다.
마가 진영 일각에서는 사건의 실체를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맥스웰이라는 이유로 그의 사면을 주장한다. 맥스웰이 엡스타인의 성접대 고객 명단을 공개하면 ‘대통령의 결백’이 입증되고 딥스테이트 연관 세력의 ‘진짜 범죄’가 드러날 것이란 주장이다. 트럼프 대통령 또한 지난달 27일 “맥스웰의 사면은 열려 있다”고 말했다.
반면 로이터통신은 “공화당 내부에서 엡스타인에 대한 파문 때문에 내년 중간선거에서 의회 통제권을 뺏길 수 있다는 우려가 팽배하다”고 보도했다. WP도 “엡스타인 사건이 더 주목받는다면 이미 지지율 내림세에 있는 트럼프 대통령에겐 더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내년 미국 경제의 상황도 중요하다. 서 교수는 “내년 미국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면 이란 공습, 엡스타인 논란 등까지 마가 진영의 불만 요소들이 묶여 ‘현직 대통령에 대한 심판 정서’가 강화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김 교수도 “저소득층, 노동자층이 마가의 주요 세력이기에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지면 그간의 불만을 표출하는 계기가 돼 아예 투표장에 나오지 않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 “음모론 즐기던 트럼프, ‘자신의 덫’에 걸려”
트럼프 대통령이 맞은 위기를 자초한 사람은 대통령 본인이라는 분석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1년 폭스뉴스 등에 출연해 “(케냐인 아버지를 둔 흑백 혼혈인) 오바마 전 대통령이 미국 출생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하와이주에서 태어났다는 출생 증명서까지 공개했지만 “그가 미국 출생이 아니라는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2020년 대선 패배 후에는 “선거 결과가 조작됐다”며 부정선거 음모론을 적극 제기했다.
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은 음모론을 적극 이용한 최초의 대통령”이라며 “그가 대통령에 처음 당선된 2016년 이후로 미국 정치가 음모론에 상당히 취약해졌다”고 진단했다. 특히 재집권 전 엡스타인 음모론을 적극 이용하다 돌연 태도를 바꾼 트럼프 대통령의 오락가락 행보는 마가에게 “신(神)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서 교수 또한 “트럼프라는 정치인의 등장 후 차분하게 대화하고 합의에 도달하는 ‘진짜 정치’가 사라지고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현상만 심해지면서 가짜뉴스와 음모론이 판치는 환경이 조성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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