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년 프랑스 대선 유력 주자로 꼽히던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옛 국민전선)의 의원 겸 전 대표 마린 르펜은 올 3월 대선 가도에 빨간불이 켜졌다. 정치자금 횡령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기 때문이다. 즉각 항소에 나섰으나 1심 판결에 따라 피선거권이 5년간 제한된 상태다.
판결이 나고 2개월 뒤,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미국의 외교를 담당하는 국무부의 대표단이 파리를 방문해 구명 운동을 제안한 것. 미 국무부가 해외 극우 정치인 지지 활동에 나선 것을 두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인권관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는 평가가 나온다.
수십년간 전 세계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을 위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미 국무부가 트럼프 행정부 들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 인권 담당 조직 대폭 축소
국무부는 올 4월 대대적인 조직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인권과 민주주의 증진을 위한 조직을 대폭 축소하는 내용의 조직 개편안을 공개한 것.
개편을 두고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 우선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지난 15년 동안 국무부는 급진적 정치 이념에 더 충성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냈다”며 “미국의 핵심 국익과 부합하지 않는 프로그램 중 법률로 보장되지 않은 것들은 종료될 것”이라고 밝혔다.
곧바로 민간안보·민주주의·인권 담당 차관 직책을 폐지하기로 했다. 국무부는 총 6명의 차관을 두고 있었지만 5명으로 줄이는 것이다.
국제 형사 사법 담당 사무국과 분쟁·안정화 사무국, 글로벌여성현안과 다양성·포용성 업무를 담당했던 사무국도 폐지한다. 개편 작업은 다음달 1일까지 완료할 예정이다.
● ‘유럽 민주주의’와의 대결
루비오 장관은 “국무부 민주주의·인권·노동국이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좌파 운동가들의 정치 보복 수단으로 사용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바이든 행정부가 폴란드, 헝가리, 브라질의 ‘반(反)워크’ 지도자들을 겨냥했다고 봤다.
이들 국가의 지도자들은 어떤 특징을 지녔을까. 폴란드의 보수 정부는 언론 탄압과 사법부 독립성 훼손을 이유로 비판받았다.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2010년 복귀 이후 민주주의 억압을 강화했고,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은 2022년 대선 결과를 뒤엎으려 한 혐의로 재판 중이다.
루비오 장관이 주도하는 작업을 두고 “인권 개념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외교 정책을 통해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에서 추진하는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프로그램 폐지와 반워크 정책에 힘을 실겠다는 취지로 풀이된다.
루비오 국무장관(왼쪽)과 헤그세스 국방장관. 워싱턴=AP 뉴시스국무부에서 인권 업무를 맡고 있는 사무엘 샘슨(26) 민주주의·인권·노동국 선임고문도 주목받고 있다. 보수 시민단체에서 발탁된 샘슨은 대표적인 ‘영 마가’ 투사형 참모로 꼽힌다. 그는 유럽의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있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최근 공개한 글에선 “유럽이 디지털 검열, 대규모 이민, 종교의 자유 제한, 그리고 자치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공격의 온상이 됐다”고 주장했다. 특히 르펜 판결이 “유럽 좌파가 법을 무기화(lawfare)한 표현의 자유 탄압”이라고 언급했다.
● “인권은 전략적 투자”
인권 개념 변화는 트럼프 행정부 전반에서 드러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서 “중동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훈수 두지 않겠다”고 연설했다. 그는 “평화, 번영, 진보는 전통을 버리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각국의 유산을 포용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했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도 현실주의 관점을 강조했다. 지난달 31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 연설에서 “미국은 과거처럼 도덕적이며 훈계적인 외교정책에 관심이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타국이 특정 정책이나 이념을 채택하라고 압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통과 군을 존중하고, 공통의 이익이 일치하는 지점을 중심으로 평화와 번영을 추구하려 한다”고 말했다.
닉슨 대통령(왼쪽) 키신저 국무장관. 사진 출처 닉슨 대통령 기념도서관미국 역사에서 현실주의 외교가 주목을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데비 샤르낙 미국 사학 및 국제학 교수는 타임 기고에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은 대국 정치에 기반한 현실주의 접근을 중시했고, 인권은 공허한 제스처에 불과한 부차적인 문제로 취급했다”고 짚었다.
이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닉슨 행정부는 이란 팔레비 국왕의 권위주의 통치를 규탄하지 않았다. 대신 1973년 걸프 산유국의 석유 금수조치 이후 이란 원유를 대거 수입했다.
닉슨의 현실주의 외교가 장기적으로 미국 안보에 해가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란에서는 팔레비 왕조 전복을 꾀하는 반체제 세력이 규합하고 있었고, 결국 1979년 이슬람혁명과 신정일치 이슬람 공화국의 탄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직후에는 혁명세력이 미국 대사관에서 미국인 52명을 인질로 붙잡고 444일간 억류하는 일이 벌어졌다.
미국 외교 정책은 1977년 지미 카터 행정부가 출범하며 반전됐다. 인권을 외교 정책의 핵심으로 보는 흐름이 등장한 것. 카터 대통령은 인권을 단순한 도덕주의가 아니라 현실 외교의 전략적 구성 요소로 보고 적극 활용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출범 첫해에 국무부 민주주의·인권·노동국을 신설했고, 연례 국가별 인권보고서를 공개로 전환했다. 인권 지향 외교가 냉전 종식 후 동유럽 정세 안정에 도움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폴란드에서는 민주주의 노동운동 ‘자유노조(Solidarity)’가 1989년 소련 해체 이후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주도했다.
다니엘 프리드 전 주폴란드 미국대사는 “인권을 중시하는 외교는 도덕적 미사여구가 아니라 전략적 투자였다”며 “미국 외교는 늘 일정 정도 현실주의를 필요로 하지만, 인권은 전략적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실효성 있는 목표임이 입증됐다”고 24일 저스트서큐리티 기고에서 분석했다.
● “우리에게 낯선 일이다”
RN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RN은 미국 측의 제안을 거절했다.
RN은 최근 서민과 프랑스 정체성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있다. 반인종, 반이민 등 극우 이미지를 탈피하고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에 트럼프 행정부의 지지가 프랑스 유권자들에게 자칫 반감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해 제안을 거절한 것.
르펜의 측근은 거절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외국 정부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은 우리에게 낯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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