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궤양성 대장염 진단을 받은 이기영 씨(왼쪽)는 약이 듣지 않아 스테로이드 치료에만 의존했다가 신약 임상시험에 참여한 후 증세가 개선됐다. 이 씨를 치료한 황성욱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교수(오른쪽)는 궤양성 대장염이 난치성 질환이지만 좋은 신약이 계속 출시되고 있어 희망을 잃지 말 것을 환자들에게 당부했다. 서울아산병원 제공
이기영 씨(50)는 운동을 즐겼다. 19세 때부터 20년 넘게 헬스클럽에서 근력 운동을 했다. 30대 중반 이후에는 보디빌더 지역 대표로도 활동했다. 그 무렵에는 헬스클럽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다. 권투를 배운 적도 있다. 물론 유산소 운동도 빠뜨리지 않았다. 주 2회 혹은 3회, 5~10㎞를 달렸다. 산에도 자주 올랐다.
건강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다만, 건강에 좋지 않은 습관이 딱 하나 있었다. 과도한 음주. 이 씨는 40대 초반이 될 때까지 거의 매일 술을 마셨다. 업무를 위한 술자리가 많았지만, 그냥 술이 좋아 마실 때도 많았다. 일단 술자리가 시작되면 최소한 소주 3병에 맥주 3병 이상은 마셨다. 친구와 단둘이 소주 20병을 그 자리에서 비운 적도 있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에는 간혹 설사가 나왔다. 약한 강도의 치질까지 있어 아주 가끔은 피가 살짝 변에 섞여 나왔다. 그래도 걱정은 하지 않았다. 술 때문이려니 생각했다. 실제로 이런 증세는 곧 사라졌다. 그러다 2016년 11월, 증세가 악화하기 시작했다.
● 설사와 혈변, 잔변감이 특징
종전에는 술 마신 후 하루나 이틀 동안만 증세가 나타났다. 이 무렵부터는 증세가 쉬 사라지지 않았다. 설사와 혈변을 속수무책으로 봤다. 일을 보고 나서도 잔변감이 무척 심했다. 갑자기 대변이 나올 것 같은 ‘급박변’ 증세도 생겼다. 잠을 자는 새벽에 갑자기 변이 마려워 일어나야 했다. 이러다 보니 하루 10~15회는 화장실을 들락였다.
증세가 오래 지속되자 비로소 걱정되기 시작했다. 이 씨는 동네 의원에 가서 대장내시경 검사를 받았다. 의사는 궤양성 대장염이 의심된다며 큰 병원에 가 보라고 말했다. 이 와중에 증세는 더욱 심해졌다. 이 씨는 매일 20회 이상 설사와 혈변을 누는 고통을 치러야 했다.
이 씨는 서울아산병원을 찾았다. 예상한 대로 궤양성 대장염 진단이 떨어졌다. 면역체계가 자신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 일종으로, 치료가 쉽지 않은 난치성 질병이다. 대부분의 자가면역질환처럼 병의 명확한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이 씨 치료를 담당한 황성욱 서울아산병원 소화기내과 교수는 “궤양성 대장염은 30대와 40대에 많이 발병한다. 이 씨처럼 2주 이상 설사와 혈변, 급박변이 이어진다면 이 병을 의심해야 한다. 일찍 발견할수록 치료 효과가 높다”고 말했다. 식습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황 교수는 “이 병을 악화하는 여러 요소가 있는데 기름지고 맵거나 튀긴 음식, 자극적인 음식이 70%를 차지한다”고 강조했다.
● 듣는 약 없어 입원과 퇴원 반복
황 교수는 일단 극심한 염증부터 잡기 위해 스테로이드 약물을 고용량으로 투입했다. 일반적으로 스테로이드 약은 염증을 신속하게 누그러뜨리는 데 효과가 크다. 다만 장기간 고용량을 사용하면 신체 여러 장기가 손상되고 혈압과 혈당이 상승하며 면역 시스템 이상을 유발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스테로이드 약은 기한을 정해 단기간 처방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 씨는 중증 중에서도 중증이었다. 신속한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황 교수는 “급한 불부터 끄자는 생각으로 고용량 스테로이드 치료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당장은 증세가 개선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평화롭고 안정적인 기간은 아주 짧았다. 2017년 1월, 이 씨는 증세가 다시 나타나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다. 2주 치료 후 증세가 호전되자 퇴원했다. 하지만 얼마 후 다시 증세가 악화해 입원했다. 이런 식으로 2018년 6월까지 이 씨는 모두 7회 입원해 2주씩 집중 치료를 받았다.
완벽한 치료가 안 되는 이유가 있었다. 뚜렷한 효과를 나타내는 약물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통 궤양성 대장염이라면 1차로 항염증제를 쓰고, 효과가 없으면 추가로 다른 대장염 치료제를 병행 투입한다. 그래도 효과가 없다면 마지막으로 면역을 억제하는 생물학 제제(製劑)를 쓴다. 이 씨도 똑같은 절차를 거쳤다. 당시 출시돼 있던 세 종류의 생물학 제제를 모두 써 봤지만 증세는 개선되지 않았다. 황 교수는 “이런 약은 환자의 70% 정도는 효과를 본다. 이 씨는 나머지 30%에 해당했다. 쓸 약이 더 이상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 때문에 부작용이 우려되지만 어쩔 수 없이 고용량 스테로이드 치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
● 일상생활 자체가 어려워
입원 치료 중일 때는 몸이 편했다. 금식하면서 장을 쉬게 해 주고 영양 수액 주사를 맞았다. 스테로이드 처방이 염증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퇴원하면 한 달 만에 어김없이 증세가 악화했다. 그러면 다시 입원하는 삶이 반복됐다. 일상생활은 엉망이 돼 버렸다.
급박변 증세가 나타나면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처음에는 여벌 속옷을 가지고 다녔다. 얼마 후에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게 됐다. 직접 운전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고속도로에서 차량을 운전하다 급히 차를 세워 변을 보기도 했다. 차에 이동식 변기와 기저귀를 비치해 뒀다.
이 씨 자신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도 했다. 건강한 사람의 변을 이식하면 궤양성 대장염이 나아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알게 됐다. 집에서 어린 아들의 변을 희석해 좌약 하듯 이식했다. 3일마다 한 달 동안 변 이식을 했다. 하지만 효과는 없었다. 황 교수는 “이런 방법이 효과가 있을 수는 있지만 확실한 의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미리 알았다면 말렸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간요법에도 의지해 봤다. 영지버섯이 좋다는 말에 열심히 달여 마셨다. 효과는 없었고 오히려 간 수치만 높아졌다. 이후 민간요법을 완전히 끊었다.
장기간 스테로이드 약을 쓰면서 부작용도 나타났다. 대표적인 게 뼈엉성증(골다공증)이었다. 황 교수는 “근육량이 줄어들고 마르기 시작하면서 이런 부작용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이러다 보니 한때 우울 증세까지 나타났다. 입원할 때 몸은 편하지만 우울함은 오히려 심했다. 이 씨는 “어린 아들과 영상 통화를 하면서 우울함을 달랬다. 그마저도 없었으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 신약 임상시험 참여하고 증세 호전
더 이상 쓸 약이 없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대장을 절제하는 수술을 검토했다. 삶이 많이 불편해질 게 빤했다. 하지만 스테로이드 약물을 이대로 계속 쓸 수는 없었다. 폐렴이나 장 천공과 같은 응급 상황이 발생할 우려가 컸다. 이 씨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러던 중 2019년 1월, 궤양성 대장염 신약이 나오면서 임상시험이 진행됐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임상시험에 지원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신약을 복용하기 전에는 매일 15회 이상 혈변을 봤는데, 신약을 쓰고 한 달 만에 횟수가 줄기 시작했다. 다시 한 달 후에는 혈변이 하루 3회로 줄었다. 어떤 약도 듣지 않았는데 2개월 만에 신약 효과가 나타난 것.
2020년 이후로는 발병 이전 상태를 회복했다. 다만 신약의 부작용으로 대상포진을 5회 앓았다. 이 또한 얼마 후, 이 씨 몸 상태에 맞는 대상포진 백신이 개발되면서 접종으로 예방할 수 있게 됐다.
지금은 신약과 항염증제만 복용하고 있다. 스테로이드 약물은 끊었다. 3개월마다 병원을 찾아 몸 상태를 살펴야 하는 불편은 있지만 건강에는 문제가 없다. 식습관도 바꿨다. 장을 자극할 수 있는 맵고 짜거나 기름진 음식은 되도록 피한다. 날 음식은 혹시 모를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살짝 데쳐 먹는다. 술도 2주에 한 번꼴로 맥주 서너 잔만 마신다. 예전처럼 운동도 꾸준히 한다.
황 교수는 “환자가 어려운 상황을 잘 버티고 낙천적으로 투병했기에 지금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궤양성 대장염 환자들에게 “이 신약 말고도 다섯 종류의 신약이 더 나와 치료할 때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앞으로도 신약은 계속 나온다. 환자들이 끈기를 가지고 투병에 임하면 완치에 가깝게 치료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기영 씨 궤양성 대장염 투병 일지
2016년 11월 설사와 혈변 증세 악화 서울아산병원에서 궤양성 대장염 진단 받고 스테로이드 치료 시작 2017년 1월 증세 악화로 재입원해 고용량 스테로이드 주사제 투입 2017년 1월~2019년 초 입원 2주 치료 후 퇴원 반복하며 총 7회 입원 모든 약물 다 썼지만 증세 개선되지 않음 건강한 대변을 이식하거나 민간요법에도 의존 아무런 효과 없자 대장 절제 수술 검토 2019년 1월 신약 임상시험 참여 2019년 3월 신약 투입 2개월 만에 증세가 눈에 띄게 호전 2020년 이후 신약 부작용으로 대상포진 5회 앓다가 백신 접종으로 해결 2025년 현재 건강한 상태 신약과 항염증제만 복용하며 운동 늘리고 식습관 조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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