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조롱거리 된 러시아 요원들의 실수[정일천의 정보전과 스파이]

  • 동아일보

정일천 전 국가정보원 국장
정일천 전 국가정보원 국장
스파이들이 영화 속 제임스 본드처럼 매번 성공적으로 미션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난도가 높아 달성하지 못하는 임무도 있지만, 스파이의 미숙함이나 황당한 실수 때문에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어느 정보기관이든 부끄럽고 창피해 숨기고 싶어 하는 실패 사례가 존재한다. 스파이 최강국으로 평가받는 러시아의 대표 정보기관이 원칙을 무시한 정보활동으로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 적도 있다.

2018년 러시아 정보총국(GRU)은 국제기구인 화학무기금지기구(OPCW)에 대한 사이버 공작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요원 4명을 OPCW 본부가 있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했다. 그런데 이들은 가명으로 된 일반 여권이 아닌 실명 외교관 여권(사진)을 사용했다. 비밀공작을 수행하는 스파이가 외교관 신분으로 입국하는 것은 감시를 자초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들의 동선은 현지 방첩당국에 포착됐고, 작전은 실패로 끝나며 요원 전원이 추방됐다.

GRU 요원들의 아마추어 같은 행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작전 중에는 보안에 위배되는 자료나 물품을 소지하면 안 된다는 원칙이 무색하게, 이들은 비밀 자료가 저장된 노트북을 휴대했다가 압수당했다. 왜 OPCW를 해킹하려 했는지 등 공작의 목적과 배경이 노트북을 통해 확인됐다.

당시 OPCW는 영국 스파이로 활동하다가 망명한 전직 GRU 요원을 신경작용제 ‘노비초크’로 암살하려 한 사건과 시리아 내 화학무기 사용 의혹 등 러시아가 배후로 지목된 사건들을 조사 중이었는데, 이를 방해하고 무력화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이 과정에서 GRU가 2014년 러시아-우크라이나 국경에서 격추된 말레이시아 여객기 사고 조사 기관을 비롯해 도핑 문제로 러시아를 제재한 국제올림픽위원회(IOC) 등에 대한 사이버 공격에 관여한 사실도 드러났다.

이들의 실책은 또 있었다. 압수된 물품 중에는 출국 당시 모스크바 공항까지 이용하고 받은 택시 영수증이 있었는데, 영수증에 적힌 출발지가 GRU 청사 앞이었다. 이것이 신분 노출의 단서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추방 이후 더욱 놀라운 GRU의 민낯이 공개됐다. 네덜란드의 한 민간 조사기관이 러시아 교통 데이터베이스 프로그램에 접속해 추방된 요원들의 신상 정보를 추적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이 모두 같은 주소지에 등록된 사실을 확인했는데, 바로 GRU 주소지였다. 이에 동일한 주소로 등록된 차량을 검색한 결과 차량 305대와 GRU 요원들로 보이는 소유주 명단이 나왔다. 누구나 접근 가능한 인터넷 사이트에 요원들의 신원을 노출시킨 대형 보안사고였다. 요원들이 신분을 이용해 교통단속을 피하려고 편법을 쓴 것으로 보였다.

냉전 시기 눈부신 스파이 활동으로 명성을 쌓았던 GRU에 대한 비난과 조롱이 쏟아졌다. 국가정보원에도 2011년 방한한 인도네시아 특사단 숙소에 요원들이 잠입했다가 어이없게 노출돼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스파이들의 프로답지 못한 실수와 그로 인한 작전 실패로부터 자유로운 정보기관은 없다. 스파이들의 실수는 방심과 전문성 부족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방심이라는 리스크는 치밀한 상황별 대응 계획 수립 등 작전에 임하는 자세를 통해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스파이의 전문성은 많은 시간과 경험, 교육의 축적물로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는다. 정보활동에서 사고와 실패는 언제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감기와 같다. 이를 예방하기 위한 최고의 백신은 전문성이다.

#러시아#GRU#스파이#OPCW#사이버공작#정보활동 실패#보안사고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