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인사이트]‘조용한 사직’이 유행하는 이유

  • 동아일보

코멘트

최근 한 의사가 유튜브 채널에서 MZ세대 수련의와 일하며 겪었던 당황스러운 경험을 털어놨다. 중환자실에서 환자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자, 당시 전공의였던 그는 옆에 있던 수련의에게 긴급 조치를 요청했다. 하지만 수련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퇴근 시간이니 당직 의사를 부르라는 것이었다. 그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고 했다. 이 짧은 일화는 일의 의미와 책임감에 대한 세대 간의 현격한 인식 차이를 보여준다. “오늘 할 일은 끝났으니 퇴근”이라는 수련의의 말 속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외에는 선을 긋겠다는 방어적인 태도가 엿보인다.

이러한 태도는 이제 ‘조용한 사직(Quiet Quitting)’이란 이름으로 모든 직업군에 광범위하게 퍼져 나가고 있다. 조용한 사직이란, 사직서를 내진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회사를 떠난 상태를 말한다. ‘해고당하지 않을 만큼만 최소한으로 일하겠다’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2022년 미국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중 약 50%가 업무에 몰입하지 않는 ‘조용한 사직자’로 분류될 정도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걸까? 단순히 개인의 책임감이 부족해서일까? 얼마 전 만난 한 졸업생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기업에서 공기업으로 이직했다는 소식에 축하를 건네자,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사노비에서 공노비로 직업만 바뀐 셈이죠. 어차피 직장은 다 똑같아요. 그냥 시키는 일 하는 곳이죠.” 자신의 역할을 조선시대 노비처럼 ‘주어진 일만 수행하는 존재’로 여기는 그의 말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마음은 일상에서도 자주 느낀다. 동네 식당을 가보면 누가 주인이고, 누가 직원인지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손님에게 친절하고 책임감 있게 응대하는 사람은 주인일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무심하게 일하고 건성으로 응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는 직원이다.

조용한 사직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나는 이 회사의 주인이 아니다’란 냉정한 현실 인식에서 비롯한다. 특히 권한 없이 책임만 주어지는 환경에서 직원은 스스로를 ‘노동력을 파는 사람’으로 여길 뿐이다. 그러니 맡은 일만 최소한으로 해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즉, 조용한 사직은 개인의 나태함이나 무관심이 아니라, ‘내가 아무리 애써도 조직은 바뀌지 않는다’ ‘내 자리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반복된 경험이 만든 자기방어 기제인 셈이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줄이고 스스로를 지키려는 생존 방식이다.

문제는 조용한 사직이 개인과 조직 모두에게 큰 대가를 치르게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일터에서 보낸다. 만약 그 시간이 무기력하고 고통스럽다면, 삶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같다. 사회에 기여한다는 보람과 스스로 성장한다는 성취감이 사라질 때, 개인은 서서히 소진되고 결국 침묵 속에서 퇴보하게 된다.

이는 조직에도 치명적이다. 갤럽 보고서에 따르면, 조용한 사직자의 비율이 높을수록 이직률은 물론이고 고객 만족도와 생산성이 하락하며, 종국에는 수익성 악화로까지 이어진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결국 직원들이 자기 일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이 조직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직원 스스로 자율성을 체감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가령 팀의 목표를 세울 때부터 직원을 참여시키거나, 업무 방식과 순서를 스스로 정할 재량을 주는 것이다. 또한 자신의 목소리가 실제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팀의 회식 장소를 정하거나 팀워크 향상 아이디어를 공모하는 등 작은 일에서부터 직원들의 의견을 구하고, 그 결과를 빠르게 실행에 옮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 의견이 조직에서 통한다’는 경험은 직원의 소속감을 높이고, 장기적으로 주인의식을 키울 수 있다.

공정한 평가와 그 결과가 개인의 성과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투명하게 설명하는 과정 또한 필수적이다. 이런 신뢰가 쌓일 때, 직원들은 ‘노력할수록 인정받는다’는 믿음을 갖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용한 사직은 개인의 감정 문제가 아닌, 조직의 구조적인 문제이다. 사람은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세계에만 마음을 쏟는다. 그리고 직원들에게 그 믿음을 심어주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 그것이 리더의 진정한 역할이다.

※이 글은 동아비즈니스리뷰(DBR) 425호(9월 2호) ‘“월급만큼만 일한다”는 ‘조용한 사직’ 확산’ 원고를 요약한 것입니다.

#조용한 사직#MZ세대#책임감#직장 문화#주인의식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