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가계와 기업 등 민간부채가 1990년대 일본 경제의 버블이 붕괴되기 직전과 비슷한 수준이라는 한국은행의 진단이 나왔다.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겪고도 구조개혁을 통한 ‘부채 다이어트’ 없이 부동산으로 자금 쏠림이 지속된 탓이다. 한국의 과도한 민간부채는 물론이고 높은 부동산 가격, 급격한 저출산·고령화, 산업 경쟁력 약화 등의 징후가 거품 경제가 꺼지던 당시의 일본을 빼닮아 ‘잃어버린 30년’을 따라간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은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부채 비율은 2023년 기준 207.4%로, 일본의 부동산 버블이 최고 수준이던 1994년의 214.2%에 근접했다. 특히 민간부채에서 가계부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45%로, 버블 붕괴 직전의 일본(32%)보다 훨씬 높았다. 부동산 업종에 대한 대출 집중도 역시 한국이 일본 버블 경제 시기의 3배에 달했다. 민간부채 절반 정도를 가계가 짊어진 데다, 생산성이 낮은 건설·부동산 업종으로 쏠림이 심해 부채 리스크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일본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는 뜻이다.
1990년대 들어 한국 등 신흥국에 제조업을 조금씩 내주던 일본은 부동산 가격 폭락으로 대표되는 버블 붕괴와 이에 따른 소비 침체, 초고령화 등이 한꺼번에 덮치며 장기 저성장 국면에 진입했다. 앞선 경제 호황기 때 ‘부동산 불패 신화’가 확산되며 제조업이 아닌 부동산으로 자금이 과도하게 유입됐고, 이로 인해 쌓인 부채가 버블 붕괴 후 한꺼번에 부실화되면서 은행과 기업의 줄도산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까지 연평균 7%를 넘나들던 일본 경제성장률이 급전직하해 30년간 0%대 ‘제로 성장’에 갇힌 배경이다.
부동산에 편중된 자산 구조와 급증하는 가계 빚이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저해한다는 국내외 기관의 경고가 쏟아진 지 오래지만 달라진 게 없다. 부동산 관련 민간부채는 최근 10년간 해마다 100조 원 이상 늘어 지난해 말 1932조 원을 넘어섰다. 1970, 80년대 세계 2위 경제대국이던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을 버틸 체력이라도 있었지만, 가계와 기업의 소비·투자 여력이 소진된 한국은 ‘빚의 덫’에서 탈출하지 못하면 지속 가능한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운 처지다. 저성장에서 탈출하고 혁신 기업과 신산업으로 돈이 돌게 하려면 부동산발 ‘가계 빚 폭탄’에 정면 대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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