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첫 4일 동안 54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석유 시추 확대, 가상화폐 촉진 등 대선 때부터 예고하던 것들이다. 불법 이민자 자녀의 시민권을 제한하는 조치도 빠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합법 시민권자나 영주권자가 아니라면 불법 체류자 어머니가 낳은 아이에게 미국 국적을 더 이상은 안 준다는 내용이다. 어머니가 유학, 관광, 단기 근로를 위해 정식으로 입국했다가 출산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인구 3억4500만 명인 미국에서는 한 해 약 360만 명이 태어나는데, 이 행정명령대로라면 25만∼30만 명이 미국 국적을 못 얻게 된다.
▷무더기 행정명령에 제동을 건 것은 법원이었다. 워싱턴주 존 코큰아워 연방판사는 23일 “이만큼 명백한 위헌 사례는 못 봤다”며 우선 ‘2주간 효력정지’ 결정을 내렸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모두가 미국 시민”이라는 수정헌법 14조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다. 이 판사는 “(2주 뒤인) 2월 5일 추가로 판단하겠다”고 예고했다. 결론이 뒤바뀔 가능성은 작다는 전망이 많아, 기세등등하던 트럼프로선 첫 역풍을 맞은 것이다.
▷수정헌법 14조는 남북전쟁으로 노예 해방이 선언된 직후인 1866년 흑인 노예와 그 자녀의 권리 보장을 위해 만들어졌다. 미국식 속지(屬地)주의의 근간이 됐다. 과거에도 수정헌법 14조의 적법성을 연방대법원이 2차례 검토한 적이 있다. 1898년과 1982년인데, 헌법상 출생시민권(birthright)이 명확히 표현돼 있어서 다른 해석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에도 “불법 체류자 자녀에게 시민권을 준다니, 웃기지 않느냐. 지구상에 미국 한 곳만 이렇다”며 행정명령을 예고한 적이 있다. 속지주의는 미국 외에도 캐나다, 멕시코,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약 30개국이 채택하고 있지만, 사실관계에는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러다가 코로나가 창궐하자 계획을 미뤘다. 대통령 행정명령을 발동해 최상위 법체계인 헌법 조항에 반하는 정책을 편다는 발상이 트럼프답다.
▷트럼프는 백인 유권자의 공(恐), 벽(壁), 노(怒)를 앞세워 재선에 성공했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공포심, 그래서 쌓아올린 미-멕시코 국경의 긴 장벽을 활용해 백인 지지층을 상대로 분노 마케팅을 펼쳤다. 트럼프는 취임사에서 “나는 정책추진 동력(mandate)을 부여받았다”고 선언했다. 뭘 해도 정당성이 주어졌다는 믿음이다. 그렇다 보니 전문성과 경력보다는 충성심을 기준으로 장관을 발탁했고, 이벤트 같은 서명식을 통해 충분히 검토됐는지 모를 행정명령들을 쏟아냈다. 그러다가 법원에 가로막힌 것이다. 트럼프식 정치가 언제까지 지금처럼 좌충우돌할지 모를 일이다. 트럼프 2기 4년은 트럼프의 몰아치기 국정과 미국의 촘촘한 시스템 사이의 힘 겨루기로 기억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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