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압수수색 영장이 있더라도 비밀번호를 아는 피의자 머릿속까지 수색할 수는 없다. 그래서 수사기관이 압수한 휴대전화를 열어보려면 주인의 협조가 필요하다. 수사를 직접 해본 피의자들 중에 이 점을 이용한 사례가 종종 있었다.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는 검찰 수사를 받을 때 자신의 아이폰 비번 24자리를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당시 검찰은 2년이 다 되도록 잠금을 풀지 못했고 결국 불기소했다. 알파벳, 숫자, 특수문자를 섞어 6자리로만 만들어도 가능한 조합이 560억 개가 넘는다고 하니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공수처 수사를 받았던 손준성 전 검사장도 휴대전화 비번을 밝히지 않았고, 그 역시 무죄가 확정됐다.
▷다만 피의자들이 휴대전화 비번을 정당한 사유 없이 숨기면 법원은 구속이 필요한 사유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채 상병 사건 피의자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은 지난해 1월 자신의 휴대전화를 압수한 공수처 수사관들에게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 비번을 알려주고 싶지만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압수수색 현장에서 변호인 권유로 급히 비번을 설정하느라 기억이 안 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휴대전화를 열어줄 의향이 있었다면서 20자리로 비번을 갑자기 설정했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게다가 임 전 사단장은 수중 수색을 지시하지 않았고, 구명 로비도 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휴대전화야말로 그의 결백을 입증해줄 결정적 증거인데 굳이 왜 잠갔는지 잘 설명이 안 된다.
▷17일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비번이 기억나지 않는다던 임 전 사단장은 불과 3일 뒤인 20일 비번을 특검에 제공했다. “잊어버린 비번을 오늘 새벽 2시 30분경 기적적으로 확인했다. 하나님의 사랑과 가호를 느끼게 된 날”이라고 했다. 이날은 특검이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등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한 날이다. 다음 날 임 전 사단장 영장도 청구됐다. 이제라도 수사에 협조해 구속영장 발부를 피해 보려는 시도란 분석이 나왔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 덕에 비번이 생각났다는 그의 주장이 법정에서 통할지는 의문이다.
▷채 상병 특검 수사는 관련자들 주장이 하나씩 거짓으로 드러나는 과정이었다. 김태효 전 국가안보실 1차장이 ‘VIP 격노설’을 실토했고, 김건희 여사에게 구명 로비를 한 혐의를 받는 이종호 전 블랙펄인베스트 대표가 송호종 전 경호처 경호부장에게서 (임 전 사단장을) 도와달란 요청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채 상병 사건 1년 전쯤 이 전 대표와 저녁 식사를 하는데 임 전 사단장이 동석했다는 배우 박성웅 씨의 진술도 나왔다. 임 전 사단장은 이 전 대표를 전혀 모르고, 박 배우와도 식사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20자리나 되는 휴대전화 비번이 번뜩 떠올랐듯 두 사람과 식사했던 기억이 기적적으로 생각나지 말란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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