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관들은 공개 변론 때 가운데 부분이 Y자 모양인 자주색 법복을 입고 심판대의 재판관석에 앉는다. 헌법재판이 가장 발달한 독일의 것을 본뜬 것이라고 하는데, 어려운 법률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는 열쇠를 뜻한다고 한다. 헌법재판소는 이 열쇠의 의미를 ‘잡다한 세류가 모이는 대해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최후의 보루’라고 설명한다. 1988년 헌재 출범 이후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법복만은 시종일관 같은 것을 쓰는 이유일 것이다.
이 법복은 김양균 초대 재판관이 제안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대통령이 지명한 검사 출신이었지만 재직 당시 검찰의 처분을 취소하는 결정을 여러 번 내려 정부와 검찰을 난처하게 했다. 다른 초대 재판관도 “국회에서 선출되었다고 국회 눈치를 보고, 대통령 지명으로 되었다고 대통령 의중을 살피고, 대법원장 지명으로 되었다고 대법원 위상이나 걱정한다면 헌재에서 무슨 일을 하겠나”라며 소신대로 했다. 인준 과정에 얽매이지 말고 불편부당하게 심판하라는 것이 처음부터 헌재의 정신이었던 셈이다. 재판관 임명 놓고 탄핵 결과 바꾸려는 여야
정치적 파장이 가장 컸던 두 차례 대통령 탄핵 심판 때도 이런 정신은 이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구속 수사했던 악연이 있는 주심 재판관은 대통령을 파면하면 안 된다는 의견을 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당시 여당이 지명한 재판관 3명은 전부 대통령 탄핵소추안 인용 결정에 손을 들었다. 개인적 배경이나 성향을 떠나 재판관들이 헌법과 법률을 객관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최고 권력자인 대통령도 결코 헌법과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다’라는 원칙이 세워진 것이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 선고를 앞두고 정치권이 ‘헌재 정신의 종말’을 부추기고 있다. 무엇보다 여야가 자신들의 지명 몫을 지렛대 삼아 헌재에 탄핵 결과를 바꾸라고 압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여당은 최종 주문의 이견인지조차 불분명한 5 대 3 기각설을 확신하면서 헌재에 조기 선고를 요구하고 있다. 9명으로 구성된 헌재는 8명 체제에서 5 대 3 선고를 하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1명이 추가로 합류했을 때 6 대 3 인용, 5 대 4 기각으로 결론이 뒤바뀔 수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선고를 서두르면 결정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여당이 대통령을 첫 예외로 해달라고 하는 건 조바심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헌재의 출구는 “눈치 보지 말고 헌법대로”
비상계엄 전엔 국회 몫 재판관의 임명을 미루다가 뒤늦게 재판관 임명을 서두른 야당도 문제다. 헌재 소장의 부재 상태를 방치하고, 헌재가 6인에서 8인 체제로 바뀌는 데만 75일이나 걸린 것도 야당의 책임이 크다. 게다가 만장일치설이 나올 땐 가만있다가 기각설이 불거질 때마다 마은혁 재판관 후보자 임명 압박을 세게 밀어붙이는 것도 일관되지 않고, 모순적이다. 민주당이 추천했다고 민주당의 당론 편에 설 것을 당연시하는 태도는 독립된 지위를 갖는 재판관을 모욕하는 행위다.
첫 대통령 탄핵 심판 때는 재판관 한 명이 결정문에 서명을 거부하면서 선고가 예정보다 늦어졌고, 두 번째는 선고 당일 아침까지 평의를 해야 했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헌재가 스스로 탈출구를 찾았다. 이왕이면 이번에도 반대건 별개건 예상 밖 의견이 나왔으면 한다. 정치가 양극단의 대결로 아무것도 되는 게 없는 교착 상태라고, 헌재에서도 그런 행태가 반복된다면 법률가들로만 헌재를 구성할 이유가 없다. 우리 헌재의 롤모델인 독일 헌법재판관의 취임 선서대로 ‘치우침 없는 공평한 법관’의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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