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김현수]‘말하면 찍힐까’ 숨죽인 韓 경제인들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5월 8일 23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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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수 경제부장
김현수 경제부장
지난해 이맘때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해서웨이 주주총회를 취재차 찾았다. 94세의 버핏이 5시간 동안 쏟아지는 질문에 차분히 답하는 모습도 인상 깊었지만, 더 눈길이 간 건 새벽부터 줄을 서며 입장을 기다리던 3만여 명의 주주들이었다.

관광명소 하나 없는 미국 중서부의 작은 도시,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왜 이토록 많은 이들이 모였을까. 그들에게 물으니 “지혜를 얻고 싶어서”, “아이들에게 검소한 삶의 태도를 보여주고 싶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투자 비법보다도 ‘성실하게 돈을 벌고 생활은 검소한’ 버핏의 미국적 가치에 목마른 모습이었다. 버핏만의 신념에 기반한 이야기를 들으러 해마다 주총이 열리는 5월 첫째 주 토요일, 오마하에 수만 명이 몰리는 것이다.

트럼프에게도 직언하는 美 CEO들

정치적 발언을 자제하는 편인 버핏은 필요할 땐 목소리를 내 왔다. 올해에도 많은 이들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혼란스러운 관세 정책에 대해 버핏이 목소리를 내주길 기대했다. 그는 “무역은 무기가 아니다”, 동맹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엄청난 실수”라며 직언했고, 이는 전 세계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소셜미디어로 여론을 몰아가는 시대에 버핏 같은 인물의 한마디가 여론의 균형추 역할을 한 셈이다.

정권 초 서슬 퍼런 트럼프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날린 이들은 또 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은 “이대로 가다간 미국에 대한 신뢰가 추락할 것”이라고 했고, 공화당의 큰손 후원자인 켄 그리핀 시타델 최고경영자(CEO)는 “트럼프가 미 국채 가치를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제조업 CEO들은 주주들에게 상세한 ‘관세 청구서’를 공개했다. 팀 쿡 애플 CEO가 대표적이다. 그는 1분기 실적 발표 콘퍼런스콜에서 “트럼프 관세로 이번 분기에만 9억 달러(약 1조2600억 원) 비용이 들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때로는 단순한 팩트가 정치적 논란을 낳기도 하지만 주주들에게 상세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원칙은 지켜지는 것이다. 흔들리는 미국 민주주의 속에서도 그나마 경제계 리더들의 직언은 여론을 지탱하는 공공의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각계의 직언에 목마른 한국

하지만 한국 경제계는 더욱더 침묵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경제단체장을 제외하고는 이름을 걸고 직언하는 기업이나 금융권 인사들을 보기 어렵다. “말하면 찍힌다”는 인식이 지난 10년 사이 공고해진 탓이다. 그나마 사석에서 ‘관계자’ 코멘트를 전제로만 솔직한 의견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실명이 아닌 익명의 발언은 힘이 덜하다. 매번 같은 경제단체의 같은 주장도 신뢰를 유지하기 어렵다.

재계에서 실명으로 정부 정책을 정면 비판한 마지막 사례는 아마도 2011년 이명박 정부가 초과이익공유제를 추진했을 때였을 것이다. 당시 이건희 삼성 회장이 “사회주의 용어인지, 들어본 적도 없고 이해도 안 된다”고 발언해 파장이 일었다. 사회 각계의 솔직한 의견이 부딪치며 일어나는 이런 파장은 민주주의에서 꼭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요즘의 ‘파장’은 주로 정치권이나 유튜버들의 요란한 주장에서 나온다. 경제계뿐 아니라 각계의 상식적인 목소리는 그 소음에 묻히고 있다. 정치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때, 이를 견제하고 바로잡을 목소리가 점점 사라지는 것이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섰다가 찍혔다’는 경험, 흠결을 용납하지 않는 대중, 그 모든 리스크를 지기 두려운 경제인들. 상식적인 직언이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한국판 버핏들의 지혜를 들을 수 없게 됐다. ‘관계자’ 코멘트에 숨을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우리는 이미 극단적 갈등을 그 대가로 치르고 있다.

#버크셔해서웨이#워런 버핏#주주총회#미국 중서부#관세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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