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정원수]취임사로 듣고 싶지 않은 말, ‘과거 청산’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2일 23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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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수 부국장
정원수 부국장
사정기관 고위직을 지낸 인사로부터 오래전 들은 얘기다. 대통령 임기 초 과거 정부를 상대로 한 수사의 범위와 강도에 대해 3가지 방안을 청와대에 보고했다고 한다. 구별하기 쉽도록 가장 광범위하게 수사하는 보고서엔 빨간색, 중간 정도는 노란색, 가장 약한 수사 보고서엔 파란색 표시를 했다. 그런데 정치인 출신 핵심 참모가 “왜 대통령의 적을 이렇게 많이 만들려고 하느냐”는 취지로 질책하면서 파란색 안이 채택됐다고 한다. 실제로 그 정부는 정치 보복 논란에선 비교적 자유로웠다.

미래 어젠다가 수사에 묻혀선 안 돼

조기 대선이 끝나고 출범할 새 정부도 비슷한 상황에 부닥칠 것이다. 누가 되든 인기 없는 과거 정부와의 차별화를 어떻게 할지, 선택해야 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 첫 관문이 대통령의 취임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 취임식은 정치 세력의 대표가 아닌 국가 지도자로서 대통령의 권한을 위임받는 자리다. 선거 캠페인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진 국민을 하나로 묶는 절차가 필요하고, 그 때문에 전통적으로 ‘과거와의 전쟁’보다는 미래지향적인 국민 통합을 강조해 왔다.

대표적인 것이 이번처럼 조기 대선으로 등장한 문재인 정부였다. 그는 선거 때 강조하던 ‘적폐 청산’을 취임사에서 아예 뺐다. 그 대신 국민 통합을 앞세웠다. 그런데 출범 두 달 뒤 적폐 청산이 제1 국정과제가 되더니 부처별 전방위 사정 드라이브가 거세졌다. 그 결과 수사 이슈에 미래 어젠다가 묻혔고, 견제와 균형의 원칙 아래 수사기관을 차분히 재편할 수 있는 시기도 놓쳤다. ‘내로남불이냐, 아니냐’를 놓고 국민들이 다시 갈리면서 정권 연장에도 실패했다. 만약 취임사대로 했더라면 문재인 정부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을 것이다.

더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건 윤석열 정부다. 민주화 이후 역대 최소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고도 취임사에서 “너무나 당연하다”는 이유로 국민 통합을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검사 출신 대통령이 야당 수사를 노골적으로 하겠다는 숨은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든다. 야당 수사를 거칠게 하면 대통령 가족 의혹에 대해 같은 강도의 수사를 야당이 요구할 것이라는 경고도 무시하더니, 기어이 검찰은 야당 대표를 겨냥한 대규모 수사팀을 만들었다. 결과는 참혹했다. 수사는 실패했고, 오히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해 스스로 무너졌다.

정부가 국정 과제를 힘 있게 추진하려면 국가 기강을 바로잡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과거 청산은 명분과 공감대가 있는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 예를 들면 비상계엄 의혹이나 윤석열 전 대통령 부부 관련 의혹 수사는 당연히 정치 보복의 예외로 볼 수 있다. 다만 과하지 않은 강도와 방법으로 진상 규명을 해야 한다. 앞서 설명한 대로 ‘파란색 사정 신호등’을 따라가지 않으면 뒤탈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지 않고 영원히 이기는 권력은 없어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제도에선 영원한 승자가 없다. 승리 뒤에 반드시 패배가 뒤따르고, 시간의 문제일 뿐 여당은 언젠가 야당이 되고, 야당은 다시 여당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비상계엄 이후 정치적, 경제적 파산 위기에 내몰려 있다. 이 와중에 파면된 전직 대통령은 아스팔트 세력과 한 몸처럼 움직이면서 오히려 사회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계엄 사태를 완전히 극복하는 길은 과거 청산만으론 한계가 있다. 대통령부터 먼저 양보하고, 반대 세력을 포용해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권력을 나눌수록 민주주의가 더 커진다는 말도 있지 않나. 이번에는 국민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먼저 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이 나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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