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대통령이 취임하면 미국을 언제 방문하느냐가 관심사가 된다. 얼마나 빨리 미국을 방문해 한미 정상회담을 갖느냐가 새 정부의 외교 역량을 보여주는 지표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 51일 만에 미국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만났다. 당시 청와대는 역대 정부를 통틀어 출범 후 가장 빨리 열리는 한미 정상회담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 기록은 2022년 윤석열 전 대통령이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의 방한으로 취임 11일 만에 회담을 가지면서 깨졌다.
6·3 대선으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 앞에 놓인 한미동맹 이슈의 무게는 어느 때보다 무겁다.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정상외교를 복원하고 경제·안보 불확실성을 낮추는 것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다. 하지만 최근 미국의 상황을 보면 새 대통령의 방미는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다는 기존의 외교 문법이 여전히 유효한지 의문이다.
달라진 트럼프 외교
우선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방식이 과거와는 달라졌다. 트럼프 외교의 특징은 예측 불가능성이다. 기존 외교 관례를 깨고 상대를 노골적으로 몰아붙이며 ‘스트롱맨’으로서의 면모를 자랑한다. 역으로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과시욕을 자극해 눈에 보이는 성과를 안겨주는 대신 실리를 취하는 게 가능했다. 트럼프 1기 때 많은 해외 정상들이 앞다퉈 아부를 쏟아내며 트럼프 대통령과 얼마나 가까운지를 두고 경쟁했던 이유다.
하지만 트럼프 2기 들어선 이 같은 ‘트럼프 해법’은 예전만큼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더 강경해진 ‘미국 우선주의’를 전면에 앞세우면서 요구조건이 높아졌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는 트럼프 대통령 취임 18일 만에 정상회담을 가졌다. 1조 달러 투자 약속 등 선물 보따리를 풀어냈지만, ‘트럼프 관세’에 대한 양보는 얻어내지 못했다. 외신에선 ‘황금 골프채’를 안기는 ‘아부의 예술’로 트럼프 대통령과 ‘브로맨스’ 관계를 구축했던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해법이 트럼프 2기엔 더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라는 평가가 나왔다.
반대로 트럼프 특유의 유연함은 약해졌다. 지난달 미국을 찾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은 희토류 협력 등을 제안했지만 ‘남아공 백인 농장주 집단학살’ 의혹을 꺼내든 트럼프 대통령의 공세에 회담은 참사로 끝났다. 미중 관세전쟁에서 미국의 최대 약점으로 꼽히는 희토류 문제를 풀어낼 기회를 희생하면서까지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진영이 제기하는 음모론을 꺼내 든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 2기 인사와 외교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강성 마가 진영과 음모론자들이 최근 한국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지난달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한을 두고도 “한국 대선 결과에 달린 중국의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등 한중 관계에 대한 음모론을 확산시키고 있다.
방미 전 미국과 신뢰 재확인부터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유예 기한은 다음 달 8일까지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확대 요구가 기정사실화된 가운데 미 국방부의 8월 국방전략지침(NDS) 발표 전후 주한미군 감축과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가 현실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새 정부가 신속하게 해법을 찾아야 할 과제들이다. 하지만 빠른 방미가 꼭 정답은 아니다. 때마침 15일에는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24일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다. 모두 트럼프 대통령의 참석이 예정돼 있다. 위험 부담을 줄이면서 미국과의 신뢰를 재확인하고 한미 정상외교를 복원할 기회다. 한미동맹에 대한 우려를 씻겠다고 방미를 서두르다 실패하면 그 결과는 돌이키기 어려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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