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청주의 넘어 모든 아동을 품는 복지로[기고/황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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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영기 초록우산 회장
황영기 초록우산 회장
아동 복지에서 ‘신청주의’는 심각한 복지 사각지대를 양산할 수 있다. 제도가 있어도 몰라서, 혹은 보호자가 없어 신청하지 못해 지원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대통령이 최근 신청주의 문제를 지적하며 자동 지원 체계로 전환을 주문한 것은 의미 있는 변화의 신호다.

현장 사례는 문제의 심각성을 잘 보여준다. 보호시설을 퇴소한 청년은 일정 요건을 충족하면 자립수당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제도를 알지 못한 채 퇴소하면 수당을 받을 수 없다. 나중에 알더라도 소급 지원이 되지 않는다. 가장 필요한 시기에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는 것이다. 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결정적인 손실이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돌보는 아동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장애나 질병으로 일상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거나, 동생을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는 아동 스스로가 보호자 역할을 맡는다. 이들은 제도와 정보를 접할 기회가 부족하고, 신청 절차를 대신해 줄 어른도 없다. 가족돌봄 아동 지원제도가 마련돼 있지만 이런 제도가 있는 줄도 몰라 혜택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가장 힘든 처지의 아동이 제도의 울타리 밖에 서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디딤씨앗통장’이다. 취약계층 아동에게 자산 형성의 기회를 제공하는 매우 의미 있는 제도다. 아동이 매달 일정 금액을 저축하면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같은 금액을 적립해 준다. 그러나 신청주의 구조 속에서는 여러 장벽이 있다. 보호자가 없어 절차를 밟지 못하거나, 생활이 빠듯해 매달 저축을 이어갈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제도의 취지상 가장 절실한 아동이 오히려 복지에서 배제되는 역설이 벌어진다. 실제로 통장 가입률은 여전히 낮고, 장기간 유지하지 못해 중도 해지하는 비율도 적지 않다. “알아서 신청하고, 스스로 납입해야 한다”는 구조가 아이들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도입을 예고한 ‘우리아이 자립펀드’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생겨난 제도다. 모든 아동에게 기회를 보장하려는 취지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보호자가 없거나 저축 여력이 없는 아동, 언어나 돌봄 환경의 제약으로 제도에 접근하지 못하는 아동은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일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제도 도입에 그칠 것이 아니라, 누구도 배제되지 않도록 신청주의 장벽을 허무는 촘촘한 안전망이 병행돼야 한다.

해외 선진국은 이미 자동 지원 방식을 도입했다. 일본은 아동수당을 행정데이터로 연계해 자동 지급하고, 유럽은 개인정보 보호를 전제로 사회보장 정보를 공유하며 신청 절차를 최소화한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정보기술(IT) 인프라를 갖고도 여전히 ‘신청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제도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

물론 개인정보 보호와 재정 건전성이라는 과제는 있다. 그러나 추구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이젠 “모든 복지는 신청해야 한다”는 원칙에서 벗어나 “특별한 경우에만 신청이 필요하다”는 체계로 가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권리를 행정 편의보다 앞세우는 길이며 아동에게 공정한 출발선을 보장하는 길이다.

초록우산은 정부의 변화 움직임을 환영한다. 현장 경험을 토대로 모든 아동이 차별 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정부·국회·지자체·시민사회와 함께 협력할 것이다. 이번 변화가 ‘놓치는 아동이 없는 나라’를 만드는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아동복지#신청주의#복지사각지대#자동지원체계#자립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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