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3월, 가정폭력 신고로 출동한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경찰의 손에는 세 장의 카드가 들려 있었다. 가해자 즉시 체포, 8시간 동안 집 밖으로 내보내기, 경고만 하고 돌려보내기 중 하나를 무작위로 택했다.
그렇게 330건을 대상으로 6개월간 추적한 결과, 체포된 집단의 재범률은 19%로 가장 낮았고 단순 경고 집단은 그 2배에 육박했다. 그 유명한 ‘미니애폴리스 실험’이다. 가정폭력이 사적 다툼이 아니라 공권력이 개입해야 할 범죄라는 사실을 확인시킨 결과였다. 이후 미국 다수의 주(州)가 가정폭력 대응에서 기존의 ‘불간섭(hands-off)’ 원칙을 버리고 의무 체포제를 도입했다.
물론 논란도 있었다. 무조건 체포가 장기적으로는 피해자 안전에 불리할 수 있고, 무고의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반론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체포만으로 끝내지 않고 피해자 안전계획, 주거·현금 지원, 심리상담, 가해자 교정 프로그램까지 결합한 맞춤형 개입 패키지를 만들었다. 핵심은 명료하다. 사회가 얼마나 일찍, 그리고 끊김 없이 개입하느냐다.
한국의 현실은 다르다. 전체 살인(미수 포함) 피해자 중 친족의 비율은 2020년 29.6%에서 지난해 47.5%로 뛰었다. 살인 사건의 절반 가까이가 가족에 의해 벌어졌다는 뜻이다. 범행 장소 역시 집이 절반이 넘었다. 올 6월 인천 부평구에선 60대 남편이 접근금지 명령이 풀린 지 며칠 만에 아내를 살해했다. 범행 사흘 전에도 아내가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지만 곧장 조치되지 않았다. 늦어진 개입은 결국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을 가장 치명적인 공간으로 바꿔 놓는다는 걸 보여준 사례다.
현장에서도 가해자의 조기 격리를 호소한다. 제주에서 가정폭력 피해자 보호쉼터를 운영하는 허순임 소장은 “궁극적으로 이런 쉼터는 없어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가정폭력 관련 법·제도가 가해자에게 너무 관대하다 보니, 오히려 피해자가 일상을 박탈 당한 채 격리되고 있다는 뜻이다.
영국도 일찍이 초기 대응을 강화했다. ‘클레어법’이 대표적이다. 2009년 36세 여성 클레어 우드가 연인에게 살해당한 사건이 계기였다. 남성은 동거 여성 폭행 전과가 있었지만, 클레어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이를 계기로 2014년부터 영국 전역에서 ‘가정폭력 공개제도’가 시행됐다. 피해자가 직접 상대의 전과를 조회할 수 있는 ‘알 권리’와, 경찰이 위험을 감지하면 피해자에게 먼저 알리는 ‘알릴 의무’가 핵심이다. 우리에겐 없는 제도다.
한국은 “가족 문제는 가족끼리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현행범이 아니면 체포가 어렵고 주거와 상담, 생계지원 제도는 여러 기관에 흩어져 있다. 미니애폴리스 실험과 클레어법이 남긴 교훈은 분명하다. 가족 내 갈등이 폭력으로 번지기 전에 사회가 개입하고, 개입이 시작됐다면 중간에서 멈추지 않는 것.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흉기가 되는 걸 막으려면 사회가 일찍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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