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등 수도권에 직영점 5곳을 둔 한 찌개 전문점 입구엔 ‘비트코인 결제 가능’이란 안내문이 한국어와 영어로 붙어 있다. 이 가게는 국내 스타트업과 협업해 비트코인 결제망을 깔아뒀다. 온라인에서 비트코인 사용 가능 매장을 알려주는 ‘BTC맵’에도 이름을 올렸다. 코인 결제 손님에겐 특별히 음료수를 주는 서비스도 마련해 놨다. 앞으로 비트코인 거래가 대중화될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비트코인 결제 서비스가 7월 개시된 뒤 현재까지 5개 매장의 비트코인 결제는 0건이다.
마치 100만 년 전 호모에렉투스가 처음 불을 얻으려 열심히 부싯돌을 내리쳤듯 코인 경제 선구자들이 코인 결제를 시도하고 있지만 코인 결제의 불씨는 좀처럼 붙지 않는다. 환경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존의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은 주로 코인 거래소를 규제하는 내용이다. 소비자를 보호하는 법이다 보니 가상자산의 국내 발행이나 코인을 활용한 결제 등에 관한 규정이 소상히 담겨 있지 않다. 부싯돌도 둘이 만나야 불꽃이 튀는데 지금은 기업들만 의욕이 있고 규정은 없어 헛손질만 계속되는 꼴이다.
국내에서 비트코인 결제가 불법은 아니지만 관련 규정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다 보니 자영업자들도 결제를 확대하길 꺼리게 된다. 괜히 불법 업체로 낙인이 찍힐까 걱정하는 것이다. 한 가상자산 업자는 기자에게 “규정이 없다면 막지도 말아야 하는데 한국에선 정부가 행정지도나 애매한 다른 규정을 준용해 제재할 수 있어서 몸을 사리는 중”이라고 털어놨다.
신중론자들의 우려도 일리가 있다. 가상자산 결제의 장밋빛 미래만 보고 서둘러 도입했다가 부작용으로 피해를 볼 수 있다. 2022년 루나·테라의 발행사 테라폼랩스 부실로 코인 가치가 폭락하며 ‘코인런’(대규모 코인 인출)이 발생한 바 있다. 이런 사태가 재연되면 큰일이다.
‘1달러=1코인’처럼 가치가 고정된 스테이블코인도 아직 관련 법이 없어 더 준비해야 할 게 많다.
새로운 금융에 대한 우려가 크다면 이를 관리할 법부터 빨리 마련해야 하는데 국회도 입법 속도가 더디다. 정부도 국회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만큼 스테이블코인 등 가상자산 사업을 금융 규제 샌드박스 정책으로 인정해 달라고 권하고 싶다. 규제 샌드박스는 혁신성이 뛰어난 사업을 선발해 실증 사업을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제도다. 모래사장같이 비교적 안전한 곳에서 여러 실험을 해보자는 취지다. 홍콩은 지난해 이미 스테이블코인 샌드박스 제도를 운용한 뒤 올해 5월 정식 조례를 도입했다. 싱가포르도 규제 샌드박스로 실험을 거친 뒤 2023년에 일종의 정부 지침인 스테이블코인 프레임워크를 확정했다.
국내에 금융 규제 샌드박스가 적용된 가상자산 서비스는 없지만 정부가 의지만 있으면 관련 법을 손질해 시도해볼 수 있다. 이억원 금융위원장도 인사청문회에서 스테이블코인을 샌드박스로 허용하는 안을 “생각도 있고, 준비도 돼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생각과 준비에 머물지 말고 부분적으로라도 실천해 봐야 우리에게 득인지 실인지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코인 경제를 기대하는 시장의 불씨마저 사그라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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