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영국은 세계 외교가에서 부러움을 사고 있다. 동맹국에까지 대대적인 관세 공격을 가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는 8일 미국과 무역합의를 이룬 첫 국가가 됐다고 발표했다. 특히 영국산 자동차의 관세율이 기존 25%에서 10%로 낮아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영국의 관세율은 한국산 등 다른 수입차에 비해 15%포인트 낮다. 트럼프 2기 행정부를 설득하는 데 안간힘을 쓰는 국가들은 영국의 비결에 주목하고 있다.
美통상 ‘전담 마크맨’, 중재 역할
영국은 미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보고 있어 협상이 쉬운 편이긴 했다. 미국이 양보해도 무역에서 큰 손해가 없기 때문에 영국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는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해도 콧대 높은 트럼프 행정부를 설득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이들이 마음을 돌리도록 물밑에서 움직인 건 ‘숨은 전략가’들이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의 전담 ‘마크맨’으로 알려진 인도계 바룬 찬드라 총리 고문이 대표적이다. 그는 스타머 총리가 미국 워싱턴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회동하는 내내 뒤에 앉아 있었다.
찬드라 고문의 경쟁력은 전문 통상관료의 협상 기술이 아니었다. 결국 협상은 관료들이 했고, 그는 중재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한다. 스타머 내각의 제안에 망설인 트럼프 행정부의 ‘키 맨’들에게 확신을 줬다는 얘기다.
그의 중재 능력은 다년간의 네트워킹에서 쌓은 신뢰에서 비롯됐다. 2008년 세계 글로벌 금융위기로 파산하기 전까지 미국의 간판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에 다녔던 찬드라 고문은 정계와 재계를 오가며 풍부한 인맥을 다졌다. 러트닉 장관 역시 월가 출신이니 유대나 정서가 남달랐을 법하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집권) 노동당 내각에서 찬드라 고문의 기업 인맥을 따라올 자는 없다”고 평가했다.
일반 관료들이 갖지 못한 ‘특별한 영업력’도 발휘됐다. 그의 전직 동료는 가디언에 “한 기업의 최고경영자가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로 이사를 간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찬드라가 그의 자녀들이 다닐 만한 현지 명문 학교 목록을 갖고 나타날 것”이라고 귀띔했다.
트럼프 2기, 다른 접근법 필요
찬드라 고문의 존재감은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대한 접근법이 기존과 확실히 달라야 함을 보여준다. 기존 외교와 통상 질서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협상하는 트럼프 행정부엔 그 어느 때보다도 인간적 신뢰나 호감이 무기가 된다는 의미다. 어쩌면 한 관료의 개인기에 많은 게 달려 있을 수 있다.
찬드라 고문이 영국의 통상 협상팀에 ‘새롭고 젊은 피’를 수혈했다면 피터 맨덜슨 주미국 영국대사는 노련한 ‘장인의 기공’을 뽐냈다. 토니 블레어 내각 때부터 갈고닦은 유창한 언변이 큰 무기다. 맨덜슨 대사는 미국 기업인들을 꾸준히 만나 영국이 할 수 있는 일을 물었다. 또 호화로운 관저도 최대한 활용했다. 백악관 출입기자단을 위한 파티도 세 차례나 열었다.
한국은 수출 의존적인 경제구조와 북한의 위협 탓에 그 어느 국가보다도 대미 외교가 중요하다. 그런 한국에 ‘찬드라’나 ‘맨덜슨’은 얼마나 있을까. 외교의 큰 장이 섰던 2023년 프랑스 파리 현지에서 지켜본 부산 세계박람회 유치전을 떠올리면 걱정이 크다. 당시 전략도 인력도 부족해 ‘모든 사람이 모든 일을 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다음 달 출범할 새 정부는 미국과 진행될 통상협상, 나아가 정부 운영에서 정부 안팎의 실력과 전문성을 갖춘 인재를 제대로 활용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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