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평인 칼럼]일머리와 잔머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0월 1일 23시 21분


코멘트

한미 관세협상은 투자의 성격과 상관없이
3500억 달러라는 골격 자체가 실패
합의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잘된 회담 아니라
잘된 회담처럼 보이려 구체적 합의 미룬 의혹

송평인 칼럼니스트
송평인 칼럼니스트
이재명 대통령이 다른 건 몰라도 ‘일머리는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보면 그런지도 의문이다. 7월 방미 중 도널드 트럼프와 합의한 것은 ‘3500억 달러를 투자하는 대가로 상호관세를 15%로 내린다’는 것뿐이었다. 투자의 내용이 대출·보증이냐 선불 현금이냐를 놓고 다투고 있지만 애초 3500억 달러와 15%라는 수치 자체가 성공과는 거리가 멀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의 3500억 달러 투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20.4% 수준인 반면 일본의 5500억달러는 13.1%, 유럽연합(EU)의 6000억 달러는 6.9% 수준이다. 3500억 달러 투자가 김용범 대통령정책실장의 말대로 기업들이 따로 발표한 1500억 달러 투자와 별개라고 한다면 그 성격은 국가가 책임지는 것이다. 미국은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내렸지만 그동안 한국은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으로 0%의 상호관세를 적용받았고 미국과 FTA를 맺지 않은 EU와 일본은 2%의 관세를 적용받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대통령은 더 작은 폭의 관세 인하에 훨씬 더 많은 금액의 투자를 약속한 것이다.

합의서 한 장 없이도 성공이라는 자찬은 처음부터 이상했지만 합의한 대강은 실패가 분명했는데 성공이라고 우겼다. 합의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잘된 회담이 아니라 잘된 회담처럼 보이려고 합의서는 고사하고 양해각서(MOU)조차 교환하지 않았던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런 기만적인 행태는 성남시장 시절의 이 대통령에게서 익히 보던 것이다. 그는 시장에 취임하자마자 상대 당 전임 시장을 깎아내리기 위해 모라토리엄(지불유예)을 선언하더니 임기가 끝나갈 때쯤엔 모라토리엄을 극복했다고 주장하면서 청년기본소득의 시작으로 청년들에게 연 100만 원씩 나눠줬다.

모라토리엄은 쇼였다. 성남시의 시민 1인당 부채액은 서울 인천 등에 비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낮았으며 기초자치단체 시군 중에서 자립도가 가장 높은 성남시가 충분히 갚고도 남았다. 대장동 사태는 그가 제 꾀에 제가 넘어간 꼴로,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시 의회가 지방채 발행을 허가해주지 않자 공영 개발을 포기하고 민간에 개발을 맡겼다가 김만배 일당에게 천문학적 이익을 안겨준 것이다.

그가 청년들에게 연 100만 원씩 나눠 줄 수 있었던 것은 시 재정 운영을 잘해서가 아니라 실은 경기도 내의 가난한 시군으로 가야 할 돈이 경기도의 잘못된 조례로 성남시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바로잡으려 하자 광화문에 나와 스크루지 같은 단식 농성까지 벌였다. 그가 떠난 후 같은 당 소속 후임 시장이 와서 보니 성남시에는 다른 시들은 다 하는 업무에 쓸 돈까지 부족한 실정이었다.

‘호텔 경제학’이 제대로 작동할 리 없다. 소비쿠폰은 두 달 만에 약발이 끝났다. 기업 성장 없는 주식 주도 경제의 끝도 뻔하다. 우리만 당한 비자 문제는 소 잃고 엉성하게 외양간 고치고 있다.

관세 협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최종 판단은 유보해야 할 것이다. 다만 관세 협상을 자찬하던 자들이 이제는 반미(反美)를 선동하고 있어 걱정이다. EU가 미국에 무릎을 꿇었을 때 EU 정도 되는 큰 경제공동체가 앞장서 미국과 싸웠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서 EU에 합세해 일본도 싸웠다면 우리도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우리보다 훨씬 경제 규모가 큰 EU와 일본이 무릎 꿇은 마당에 우리만 맞짱 뜨겠다고 나서는 건 천지지간(天地之間) 구별 못 한 구한말 위정척사파와 다를 바 없다.

관세 협상이 실패한다면 가장 큰 책임은 15%라는 수치를 얻기 위해 ‘3500억 달러’에 합의해 준 이 대통령에게 있다. 자신이 회담 실패로 욕을 먹더라도 그때 3500억 달러를 우리나라 GDP 수준에 맞춰 낮췄어야 한다. 우리나라가 광우병 집단 히스테리로 30개월 이상 미국 소의 수입을 금지하면서 일본과 대만도 우리나라를 방패 삼아 따라 하기는 했지만 이미 일본과 대만은 수입 금지를 철회한 상태다. 맹목과 치기에 사로잡혀 열어도 되는 시장을 열지 않은 대가가 터무니없는 3500억 달러 아니었겠나. 미국은 우드로 윌슨의 가치 외교가 등장하기 전의 힘을 앞세우던 냉혹한 나라로 돌아가고 있다. 구한말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포츠머스 회담에서 일본에 한국에서의 우선권을 내주고 러시아와 평화를 중재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잔머리가 아니라 진짜 일머리만이 통하는 세상이 됐다.

#이재명#관세 협상#미국 투자#상호관세#경제정책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