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쿠르스크에서 올 1월 초 우크라이나군에 생포된 20세 북한군 포로 백모 씨. 16세에 입대한 백 씨는 전투 중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됐다. 사진 출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X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이재명 정부는 북한에 잘 보일 수 있는 조치들을 신속하고도 꼼꼼하게 취하고 있다.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에 이어 5일 확성기 20여 개가 하루 만에 철거됐다. 지난달 초에는 국가정보원이 50여 년간 운영한 대북 라디오 및 TV 방송 송출을 전격 중단했다. 표류해 넘어왔던 북한 주민 6명 송환도 빨리 이뤄졌고, ‘북한 주민 접촉 신고 처리 지침’도 폐기됐다.
이렇게 성의를 보여도 북에서 돌아온 대답은 싸늘했다. 김여정은 “이재명 정부가 우리의 관심을 끌고 국제적 각광을 받아 보기 위해 아무리 동족 흉내를 피우며 온갖 정의로운 일을 다 하는 것처럼 수선을 떨어도 한국에 대한 우리 국가의 대적 인식에서는 변화가 있을 수 없다”고 지난달 28일 선언했다. 그는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 수립되고 어떤 제안이 나오든 흥미가 없으며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는 공식 입장을 다시금 명백히 밝힌다”고도 했다. 이쯤 되면 한미 연합 군사훈련 일정 조정이나, 비전향 장기수 송환 카드도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정부 관계자들 머릿속이 “김정은, 그리고 이 대통령을 만족시킬 아이템이 무엇일까”로 가득 차 있는 동안, 수만 리 타향에선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우크라이나군의 포로가 된 북한군 청년 두 명이 7개월 넘게 방치돼 있다. 이들은 한국으로 가고 싶다는 의사를 수차례 밝혔지만, 한국에선 관심 가지는 사람이 없다.
우크라이나 사정에 정통한 인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당국이 처음에는 (한국으로의) 포로 송환 대가에 대해 생각했지만, 이젠 대가를 포기하고라도 (한국이) 데려간다고 하면 그냥 보내줄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이 포로들을 데려올 수 있는 관계 부처는 찍힐까 봐 말도 못 꺼내는 것 같다. 사실 이재명 대통령이 데려오라고 지시하면 즉각 이뤄질 일이다. 한국 정부 공무원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가서 국제법에 의거해 송환 절차를 밟으면 얼마든지 데려올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 파병된 북한군은 북한의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표본이다. 국정원은 북한군 1만5000명이 파병돼 전사자 600여 명을 비롯해 사상자 4700여 명이 발생한 것으로 파악한다. 이 사상자들 가운데 포로가 단 2명 나왔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극단적으로 세뇌된 북한군은 포로가 되기보다 자폭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우크라이나 군인들은 “북한군은 부상당한 전우를 데려갈 수 없으면 사살하고 퇴각한다”고 증언하고 있다. 부하가 포로가 되면 상관에게 엄격한 연대 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인류 전쟁사에서 전투 중 다친 부하를 죽이지 못했다고 지휘관을 처벌하는 군대는 없었다. 전투기 자살 공격인 ‘가미카제(神風)’로 악명 높았던 일본군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우크라이나군은 북한군을 포로로 잡기 위한 특수부대를 운영했지만 부상한 두 명만 생포할 수 있었다. 이 포로들은 “수류탄이 있었다면 자폭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최초로 포로가 된 북한군은 부상이 심해 죽었다고 우크라이나군이 발표했지만, 실은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공개된 다른 북한군 포로의 손이 붕대로 칭칭 감겨 있었던 것은 부상 때문이 아니라 자결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런 현실에서 두 명이 포로가 된 것도, 마음을 바꾸어 한국으로 오겠다고 한 것도 기적 같은 일이다. 그 기적을 우리는 외면하고 있다.
북한 청년들이 10년 동안 한솥밥을 먹은 전우를 서슴없이 죽이는 잔혹한 군인이 된 것도, 삶을 서슴없이 포기하도록 세뇌된 것도 김정은 탓이니 우리와 상관없는 일인가.
한국은 세계 난민을 위한 모금 광고가 TV에서 나오는 나라다. 그런데 불과 수십 km 북쪽에는 언제 죽을지 모를 전쟁터에서도 고작 돼지비계 한 덩이에 흐뭇하게 웃는 동포가 살고 있다. 러시아에 파병되면 죽을 땐 죽더라도 배부르고 뜨뜻하게 살 수 있다며 자원하는 청년들이 있다.
우리가 북한 주민을 모두 구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옥’ 같은 전장에서 생존한 20세, 26세 청년들이 하루빨리 새 삶을 살게 손은 내밀 수 있다. 이들을 외면한다면 이재명 정부가 주장하는 남북 인도주의의 의미는 달리 해석돼야 한다. 김정은에게 잘 보이는 것만 인도주의이고 잘 보일 수 없으면 인도주의가 아니란 말인가. 두 청년은 오늘도 “우릴 언제 한국에 데려가느냐”고 묻고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