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은 아내 마리오르탕스 피케의 초상을 30여 점이나 그렸지만, 그의 풍경화나 정물화만큼의 주목은 받지 못했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세잔 부인’(1888∼1890년·사진)도 그중 하나다. 그림 속 피케는 빨간 드레스를 입고 의자에 단정하게 앉아 있지만, 표정은 무덤덤하고 감정의 기색이 거의 없다. 세잔은 아내를 왜 이런 모습으로 그렸을까?
피케는 석공의 딸로 태어나 프랑스 파리에서 책 제본과 모델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다. 1869년 세잔을 만나 동거를 시작했고 아들도 낳았지만, 세잔은 재산가였던 아버지의 반대가 두려워 17년 동안 아내와 아들의 존재를 숨겼다. 두 사람은 1886년, 세잔의 아버지 사망 직전에야 정식 부부가 됐다. 하지만 이미 마음의 거리는 멀어진 뒤였다.
모델로서의 시간도 쉽지 않았다. 세잔은 오랜 관찰과 느린 속도로 그림을 그렸고, 피케는 긴 시간 포즈를 취하는 것이 지루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남편이 불같이 화를 냈다. 심지어 “사과처럼 가만히 있으란 말이야”라며 소리를 질렀다. 세잔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녀는 그림에는 유용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아내 초상에는 무표정한 얼굴이 반복된다. 하나의 사물처럼 보일 정도다.
사실 이 그림은 단순한 초상화가 아니다. 세잔에게 아내는 감정의 대상이 아닌 색과 형태, 공간의 구조를 탐구하기 위한 실험적 대상이었다. 모델에게 표정이나 움직임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것도 그의 집요한 예술적 실험 때문이었다.
화가의 아내로 산다는 건, 때로는 남편의 예술적 집착 앞에서 하나의 오브제가 되는 일일지도 모른다. 세잔은 아내를 통해 예술적 성취를 이뤘는지 모르지만, 아내의 냉랭한 표정은 말 없는 항의처럼 보인다.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끝내 마음은 닿지 못한 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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