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무소불위 21세기 新국보위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9월 4일 2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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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봉투법 등 입법폭주, 특별재판부
입법도, 재판도 다 내 마음대로였던
5공초 국보위 시절 연상시키는 작태
어떤 나라 꿈꾸는지 국민은 묻고 싶다

이기홍 대기자
이기홍 대기자
‘권력자가 뭐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시대’, 그런 암흑기는 고대나 중세의 절대왕권 시대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아직 어린 중고교 시절이었지만 1980년대 초반 TV에서 쏟아져 나오는 국보위(국가보위입법회의) 뉴스들을 들으며 느꼈던 황당한 느낌은 지금도 기억난다. 당시 국보위는 집권세력이 원하는 건 뭐든지 법률로 만들어냈다. 1980년 10월 27일 출범한 국보위가 6개월간 만들어낸 법률은 무려 189건에 달했다.

대학 신입생 시절 시위를 하다 잡혀간 선배들의 재판을 방청하면서 느꼈던 감정도 지금도 선명하다. 기계처럼 틀에 박힌 판결문을 읽으며 유죄를 때린 뒤 도망치듯 법정 뒤로 사라지던 판사들의 초라한 뒷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최고 권력자가 입법 행정 사법 3권을 다 장악했던 무소불위 절대권력의 시대는 38년 전 종식됐다. 그런데 악몽을 꾸는 걸까. 데자뷔일까. 요즘 여당에서는 ‘국보위 마인드’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을 행태와 발상들이 쏟아져 나온다.

특검이 청구한 구속영장이 몇 건 기각되니까 특별재판부를 만들려 한다. 내가 원하는 대로 결론이 나오도록 재판부를 아예 직접 인선하겠다는 상상 초월의, 정상적인 민주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꿈도 꿀 수 없는 발상이다.

지금이 지리산에 반란군이 창궐하고, 군부 내 윤석열 추종 세력들이 쿠데타를 도모하는 그런 준전시 내전 상황이라는 환각에 빠져 있지 않는 한 어떻게 재판부를 자신들이 직접 만들겠다고 할 수 있는가.

임기가 보장된 특정 기관장을 쫓아내기 위해 아예 그 기관을 해체하고 간판만 바꿔 새로 출범시킨다는 발상도 입법권을 만능 프라이팬 정도로 여기는 발상의 산물이다.

45년 전 국보위는 쌍방이 있는 쟁점들에서 한쪽 편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입법을 남발했다. 대표적 예가 노동 관련법이다. 제3자 개입 금지, 산별노조 금지 등 노조 활동을 옥죄는 쪽으로 법 조항을 양산해줬다.

요즘 정청래 대표의 민주당은 정반대 방향에서 노란봉투법 등 한쪽의 손만 일방적으로 들어주는 법안들을 만들어낸다.

우리 세상이 됐으니 우리 원하는 거 전광석화로 다 해버리고, 다시는 뺏기지 않을 굳건한 지지기반 토양을 다지겠다는 발상이 45년 전과 닮았다. 다수결과 법률이라는 형식만 밟으면 다 법치주의라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요즘 기업인들의 한숨을 들어봤는지 궁금하다. 최근 친분 있는 몇몇 중견 기업인들과 통화해봤다. 대부분 자수성가해서 한강 투신의 고비를 몇 번씩 겪으면서 어렵게 회사를 키워낸 사람들이다. 통화한 기업인들 전부가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거나 사업을 접고 싶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형 로펌 관계자는 미리 클라이언트 계약을 맺자는 회사들이 줄을 잇는다고 전했다.

야당의 존재를 아예 인정하지 않으려는 점도 닮았다. 5공 초 민정당과 초록동색의 야당들만 있었듯, 요즘 좌파 인사들 입에서는 현 좌파진영 정당들끼리 진보 보수를 나누는 새로운 이념 구도 청사진이 서슴없이 나온다. 즉, 현재 1∼10의 이념 스펙트럼에서 6∼10은 정치적으로 절멸시키고 1∼5가 좌우 구도를 형성하겠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국민은 물을 권리가 있다. 당신들이 꿈꾸는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를.

입으로는 민주주의를 말하지만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소수 의견을 존중하고 토론을 통해 접점을 찾아가는 숙의민주주의 △삼권분립 △권력견제라는 요소들은 다 내팽개쳐졌다.엄혹한 독재시절에도 온존했던 야당 배려 관행들마저 사라졌다. 이젠 야당이 추천한 야당 몫 자리의 승인마저 거부한다. 급우들 도시락 반찬을 뺏어가는 걸로 모자라, 아예 너는 내일 뭘 싸오라고 명령하는 일진 행태다.

야당을 인정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여당은 내란과의 전쟁을 이유로 든다. 내란세력 척결이 우리 사회의 최대 과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12·3 계엄은 주도 세력과 가담자 99%가 직후에 다 체포됐다. 국민적 심판은 탄핵과 대선으로 이뤄졌고, 사법적 심판은 사상 최대 규모의 특검과 사법부가 이미 진행하고 이다.

아직 척결 못한 내란 세력이라고 해봤자, 비유하자면 마을에 내려온 빨치산에게 자의든, 강압에 의해서든 주먹밥을 제공했다는 의심을 받는 마을 주민 몇 명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정 대표 등이 끈질기게 내란세력 척결을 외치는 것은 내년 지방선거까지도 이 프레임을 끌고 가며 계속 정치적으로 이용하겠다는 전략일 것이다. 과대포장해서 집요하게 선전선동하는 것은 좌파의 골수 수법이니 새삼스러울게 없는 일이긴 하다.

절대권력 독재시절을 연상케 하는 발상과 행태가 속출하는 것은 그들이 입으로는 민주화 운동 출신 운운하지만 막상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도 훈련도 전혀 안 된 사람들임을 스스로 증명해준다.

혁명 정부적 발상, 입법 독주가 지난해 4월 민주당에 압승을 안겨준 민심이 바란 것이었을까? 지난해 총선은 투표 한두달전만 해도 국힘의 압도적 승리가 예측됐었다. 민주당의 압승은 100% 윤석열 김건희 부부가 선사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필자는 어떤 일이 벌어지면 여야, 좌우를 바꿔 대입시켜서 생각해보는 걸 습관처럼 한다. 예를들어 계엄 사태가 벌어지면, ’만약 윤석열이 아니라 문재인이 2019년 조국 사태같은 위기 상황에서 계엄을 했다면 나는 어떻게 판단했을까‘하고 생각하는 식이다. 샤넬백 등 김건희 추문이 잇따를때는 김건희 이름 대신에 김정숙을 대입해보곤 했다.

이 대통령과 민주당도 역지사지 해보기 바란다. 만약 지난해 총선 당시 윤 부부가 진정성 있게 국민에게 엎드려 사과하며 엄정한 법의 심판을 받겠다고 약속하고, 개과천선한 겸손한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 국민의힘이 압승을 했다고 가상해보자.

‘공산전체주의’를 유달리 강조했던 윤 대통령이 총선 승리로 국민의 위임을 받았다며 민주당을 종북세력과 연계된 정당이라고 공격하고, 대체근로 허용, 노조에 대한 징벌적 배상 강화, 사법부 내 좌파 척결 등을 밀어붙였다면 민주당은 다수결이니까 법치주의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고 고개만 끄덕일 것인가.

문학평론가 홍사중 씨는 권력은 술처럼 사람을 취하게 만든다고 했다. 취할수록 더 마시듯 권력도 커지면 커질수록 더 취하게 된다. 천박한 권력일수록 주정꾼처럼 힘자랑을 못 참는다. 하지만 권력을 모두 움켜쥐려는 자는 반드시 모두 다 뺏기고 마는 게 세상의 이치임을 역사는 보여줘 왔다.

#권력자#야당#여당#민주주의#권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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