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두진호]강대국 거래 그늘 속 흔들리는 우크라이나 주권

  • 동아일보

러 요구 반영된 트럼프 종전안 논란 확산
‘러시아식 평화’ 평가 속 우크라 내부 반발
종전 국면 뒤 북-미회담 추진 가능성 부상
강대국 정치 격랑 속 한국 외교 중대 시험대

두진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유라시아연구센터장
두진호 한국국가전략연구원 유라시아연구센터장
미국과 우크라이나가 종전 구상인 ‘평화 프레임워크’를 마련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중대 전환점을 맞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소련군 900만 명이 전사했고, 민간인 피해는 독일군 점령지였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서부에 집중됐다. 전후 소련 세대는 국민 노래 ‘백학(Журавли)’에 전장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기억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방식으로 인간 존엄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졌다. 종전 협상이 속도를 내는 지금, 80여 년 전 백학으로 상징된 전쟁의 기억은 양국 모두를 관통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제시한 초안에는 2014년 러시아가 강제 병합한 크림반도와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러시아가 점령 중인 전 지역을 ‘러시아령’으로 간주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우크라이나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이 참여하는 다자 협의체가 우크라이나의 안전을 보장하는 방안도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전쟁 내내 양측이 가장 치열하게 맞섰던 국경선 문제와 안전보장 조치에서 미국이 사실상 러시아의 기존 주장에 힘을 실었다.

러시아의 동결 자산을 우크라이나 전후 재건에 활용하는 조건으로, 단계적 대러 제재 해제를 검토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이로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오일 머니’와 러시아의 주요국(G8) 복귀에 필요한 면죄부가 거래될 공산이 커졌다. 반면 우크라이나는 주권 일부의 장기적 제약과 NATO 가입의 무기한 연기 등 패배를 인정하는 국면으로 끌려가고 있다.

백악관은 종전 구상 입안 과정에서 러시아와의 사전 공모를 부인하고 있다. 크렘린궁은 미국의 공식 제안을 기다리겠다면서도 8월 미 알래스카에서 이뤄진 미-러 정상회담에서 도출된 핵심 합의 사항을 수정안에 반영해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다. 동시에 수정안에 대한 보이콧 가능성도 열어두며 협상 지렛대를 높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치권은 트럼프 대통령의 종전안이 주권을 심각하게 훼손한다고 평가했고, 시민사회에서도 이번 제안을 ‘러시아식 평화’, ‘강요된 평화’로 규정하는 여론이 확산하고 있다. 영토 문제는 국민주권 사안인 만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영토 포기를 받아들일 경우 ‘제2의 오렌지 혁명’과 같은 정치적 후폭풍도 우려된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연합(EU)을 방패 삼아 미국 측의 초안에 강하게 맞섰다. 그 결과로 일단 28개 조항은 19개로 축소됐고, 군 규모도 80만 명 수준으로 명시해 패전국에 부과되는 굴욕적 무장해제 의무를 삭제하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공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측근 비리와 지지율 하락으로 리더십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선택지는 좁다.

핵심 쟁점에서 양측을 동시에 만족시킬 중재안은 존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종전을 낙관하기에는 이르다. 수정안에 러시아의 불가침 의무가 포함된다고 해도 협정이 완전하게 이행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개인의 뜻과는 무관하게 전장에서 스러져간 이들이 언젠가 백학의 날개로 다시 오르기까지 숱한 난관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미 언론은 벌써부터 우크라이나 협상단이 이미 미국의 종전 구상에 동의했으며, 이달 안에 젤렌스키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해 협상을 마무리할 것이라는 낙관론을 내놓는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수정안을 수용하고 푸틴 대통령이 이에 동의하면, 4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된다. 형식상 정치적 협상을 통한 종전 요건을 갖추고 있지만, 사실상 ‘러시아의 승리 시나리오’에 무게가 실린다.

미국과 러시아가 강대국 정치를 대놓고 복원하고 있다. 냉혹한 현실주의 국제 질서에서 약소국의 주권은 언제든 거래의 대상이다. 스스로를 지켜낼 능력과 의지가 없는 국가는 강대국 정치의 희생양이 된다. 확실한 안전보장이 생략된 채 체결되는 평화협정은 우크라이나에 1994년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주변국의 보장을 근거로 핵무기를 폐기한 ‘부다페스트 양해각서’의 2막이 될 위험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 9개월 동안 8개의 전쟁을 끝냈다”며 성과를 과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중재까지 성공한다면 미국은 곧장 북-미 정상회담에 속도를 낼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식 세계관을 고려할 때, 한국이 배제된 한반도 비핵화 구상이 등장한다고 해도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한국으로서는 동맹이라는 ‘집토끼’를 확실히 붙들어두는 한편, 한반도에 영향을 미치는 중국과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도 관리해야 한다. 강대국 정치의 격랑 속에 놓인 한국의 지정학적 숙명이다. 이재명 정부의 실용외교가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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