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광암 칼럼]윤기친람, 이기친람, 만기친람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8월 10일 23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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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친람’ 성향 보이는 이 대통령
공직사회 대통령 입만 쳐다보게 만들 우려
킬러문항, 채상병, R&D예산, 대왕고래…
타산지석(他山之石) 삼아 ‘이기친람’ 싹 잘라야

천광암 논설주간
천광암 논설주간
이재명 대통령이 성남시장, 경기도지사, 야당 대표와 대권 후보를 거치면서 보여준 만기친람(萬機親覽) 리더십은 잘 알려져 있다. 만기친람 성향은 ‘마이너리티’ 한계를 딛고 자수성가한 사람에게서 잘 나타나는 특징이고, 그것이 성공의 ‘밑천’이었기 때문에 한 번 굳어지면 잘 바뀌지 않는다.

이 대통령이 취임한 지 겨우 두 달이 지났지만 그런 징후들이 여러 군데서 엿보인다. 이 대통령은 광주 대전 부산에서 3차례나 타운홀 미팅을 가지면서, 공항 이전 문제 등 민감한 지역 현안 해결에까지 직접 뛰어들었다. 인터넷 댓글과 전화 문자를 일일이 챙겨보고, SNS에 직접 글을 올리는 일도 잦다.

그중에서도 ‘단독 드리블’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산업재해 문제다. 이 대통령은 산재사고가 반복적으로 발생한 SPC 공장에는 직접 찾아가서 경영진에게 질책성 질문을 줄줄이 쏟아냈다. “교대 시간은 몇 시냐” “쉬는 시간에는 누가 업무를 대신하는가” “나흘간 12시간씩 연속 노동이 가능하냐” 등 내용도 근로감독관을 연상시킬 정도로 구체적이었다. 건설 현장 사망사고가 잇따르고 있는 포스코이앤씨에 대해서는 ‘건설 면허 취소’ ‘공공 입찰 금지’ 등 구체적인 방식까지 직접 거론하며 관련 부처에 ‘최대한의 제재’를 주문했다.

SPC와 포스코이앤씨에 법적-행정적으로 엄정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인명과 관련된 산재 문제에 대해 이 대통령이 각별한 관심을 표시하는 것도 시비할 일은 아니다.

다만 이 대통령의 ‘만기친람’ 행보가 내포한 위험성에 대해서는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사이다 같다”는 긍정적 반응이 많기에 더욱 그렇다. 실패의 씨는 잘나갈 때 뿌려지기 때문이다.

만기친람의 가장 큰 폐해는 공직사회가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대신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게 된다는 것이다. 좋은 해법보다는 대통령의 뜻에 충실한 해법을 우선하는 것이 오랜 경험칙으로 확인된 공직사회의 생리다. 더구나 대통령이 먼저 ‘디테일’을 말하면 공직사회의 사고(思考) 폭은 극단적으로 좁아진다.

포스코이앤씨의 경우, 이 대통령이 언급한 면허 취소가 과연 최선의 해법일까. 포스코이앤씨는 임직원 수만 5700명에 이른다. 이들의 가족과 2100여 곳에 이르는 협력사 직원 및 가족까지 감안하면 수만 명의 생계가 걸린 문제다. 이들 모두에게 산재의 책임을 묻는 것은 적절한가. 이미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이 제시된 상황에서, 공직사회가 이런 점들을 충분히 고려해서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해법을 찾아낼지 의문이다.

만기친람의 의도는 선하다. 하지만 국정에서는 의도보다 과정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단적인 예 중 하나가 윤석열 정부에서 있었던 수능 킬러 문항 소동일 것이다. 사교육 부담을 줄이자고 하는 데 누가 반대를 할 것인가. 하지만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서 ‘공정 수능’과 ‘사교육 카르텔 혁파’를 외친 결과는 참담했다. 경찰 교육청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등이 총동원돼서 사교육을 잡겠다고 덤볐지만, 지난해까지 사교육비는 4년 연속 최고치를 갈아 치웠다.

당시 정부와 여당에서는 어떤 반응이 나왔던가. 여당 정책위 의장은 “(윤 대통령은) 조국 일가의 대입 부정 사건을 수사 지휘하는 등 대입 제도에 누구보다 해박한 전문가”라고 했고,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라는 인물은 “제가 진짜 많이 배우는 상황”이라고 한술 더 떴다. 어느 정도 개인의 아부 성향 탓도 있겠지만,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서 대통령이 만기친람할 때 여당과 공직사회에서 흔히 나타날 수 있는 반응이 이런 것이다.

만기친람이 좋지 않다는 것은 그 말의 유래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만기친람은 원래 사서삼경 중의 하나인 서경(書經)의 ‘일일이일만기(一日二日萬幾)’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랏일에는 하루이틀 사이에도 만 가지 조짐(기미)이 있으니 미리미리 잘 살피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뒤이어 이어지는 구절, ‘적임자를 등용해, 한 가지 직무라도 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대목이다. 즉 독주(獨走)가 아닌, 적재적소 인재 배치와 권한 위임을 통해 국정을 빈틈없이 살피라는 취지인 것이다.

굳이 시대 배경이 4000년 전인 서경을 거론하지 않고, 시야를 3년 전으로만 넓혀도 이 대통령이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답은 나와 있다. 수능 킬러 문항 소동 외에도, 채상병 수사 외압 의혹,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과 번복, 월 단위 근로시간 도입 혼선, 대왕고래 광구 해프닝 등등…. 산처럼 쌓인 ‘윤기친람’의 잔해물들이다. ‘이기친람’의 싹을 미연에 과감히 잘라내지 않으면 이 대통령도 이런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없다.

#이재명#만기친람#리더십#산업재해#산재사고#공직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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