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살 때는 잘 보이지 않던 지렁이가 파주에선 자주 보인다. 어떤 지렁이는 너무 커서 ‘흡!’ 숨을 들이마신 뒤 비켜 간다. 도대체 이 많은 지렁이는 어디에 있다 나오는 걸까? 백석은 지렁이가 “장마 지면 비와 같이 하늘에서” 내려온다 한다. 지렁이가 흙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진다니, 놀라운 상상력 아닌가? 빗줄기와 지렁이의 기다란 몸이 닮은 것도 같다.
이 시는 백석의 시집 ‘사슴’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은, 어린이를 위해 발표한 동시다. 백석이 자랑하듯 말하는 “나의 지렁이”는 장차 커서 구렁이가 된다. 참으로 스케일이 큰 허풍에 미소가 지어진다. 상상해 보라. “천 년 동안 밤마다” 흙에 물을 주는 상상, 그 흙이 변해 지렁이가 되는 상상, 지렁이가 자라 구렁이로 변신하는 상상! 오묘하고 신기한 일 아닌가? 눈도 없고 얼굴도 없는 지렁이와 꼭 닮은 시처럼 보인다. 장자의 곤과 붕의 이야기도 떠오른다. 그런데 천 년 후에 구렁이로 변한 지렁이는 지렁이일까, 더 이상 지렁이가 아닌 걸까?
몇 날을 불볕더위로 허덕였는데 오늘은 종일 비 온다. 땡볕과 빗줄기가 엎치락뒤치락 몸을 바꾸면, 지렁이가 구렁이로 변하듯 여름이 가을로 바뀌겠지. 빗속에서 지렁이의 없는 눈이라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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